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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포항지진과 우리의 맨얼굴①] ‘비’ 한 글자에 나눠진 목숨의 가치

김상범 기자 ksb1231@kyunghyang.com 
2017.11.26


“학부모들에게 상황문자 돌리고 민원 전화도 올 수 있으니 교무실에 남아 계세요.” 지난 15일 울산의 한 공립학교 교무행정실무원 ㄱ씨는 교무실장으로부터 이런 지시를 받았다. 포항에서 규모 5.4의 강진이 일어나 학생들과 교직원 모두 정신없이 대피하던 중이었다. 이 학교뿐 아니었다. 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 울산지부의 이수진 사무처장은 “울산의 다른 학교 10여곳의 교무실무원들도 같은 지시를 받았다”고 전했다. 건물 내부가 무너지기라도 했다면, 전화를 돌리던 비정규직 행정직원들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이 사무처장은 “그런 지시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학교의 태도에 서럽고 화가 났다는 분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위험은 낮은 곳, 취약 계층으로 쏠린다. 자연재해와 대형참사처럼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서 ‘위험의 중력 법칙’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포항 지진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교와 대형마트에서 그림자처럼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안전장치도 없이 위험한 작업에 내몰렸다는 증언들이 여러 곳에서 들려왔다. 다행히 인명사고는 없었지만 고질적인 ‘위험의 외주화’ 문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라진 일터의 균열은 그대로 드러났다. 

포항 북구의 한동대는 지진으로 건물 외벽이 무너졌다. 한동대 청소용역업체 노동자들은 여진이 계속되던 지진 다음날, 안전점검도 받지 않은 기숙사 생활관 내부 잔해를 청소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건물 안팎에는 거미줄 같은 금이 가 있었다. 원청 격인 기숙사 관리팀 직원들은 모두 안전모를 쓰고 있었다. 이종희 경북일반노조 한동대분회장은 “관리직들이 ‘들어가도 괜찮다’고 했지만 여진 위험 때문에 누구도 들어갈 엄두를 못 내는 상황이었고 청소노동자들에게는 안전모도 지급되지 않았다”며 “노조가 강력하게 항의한 뒤에야 안전모를 지급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고 말했다. 

오마이뉴스 보도에 따르면, 포항 북구의 한 대형마트는 협력업체 직원들에게 흐트러진 진열대를 정돈하고 깨진 물건들을 치우라는 지시를 했다. 한 협력업체 직원은 “지진에 불안했는데 울며 버텼다”고 말했다. 이후 진상조사에 나섰던 마트산업노조의 정민정 사무국장은 “정직원들은 퇴근하고 협력업체 직원들만 남아 잔해를 치운 것으로 확인됐다”며 “협력업체에서 직원들에게 퇴근하라 지시해도 사실상 ‘갑’인 마트의 허락 없이는 현장을 떠날 수 없었다”고 전했다. 

강진으로 진열대의 물건들이 모두 쏟아진 경북 포항 시내의 한 대형마트.  연합뉴스

강진으로 진열대의 물건들이 모두 쏟아진 경북 포항 시내의 한 대형마트. 연합뉴스


여진 위험 속에 텅 빈 학교에 남아 학부모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마트 진열대를 치우는 일은 비정규직과 협력업체 직원이 맡았다. 그런 지시에 항의하기조차 어려웠다. 지위가 낮고 고용이 불안정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역설적이지만 누구보다 ‘조직에 충성해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원청은 이들을 ‘내 직원’이라 여기지 않는다. 책임은 지우되 안전 책임은 없다.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국장은 “파견노동자의 안전은 사용사업주가 지게 돼 있지만, 대형마트는 수십개의 협력사와 입점업체가 들어와 있어 고용구조가 복잡하고 하청업체 안전에 대한 원청의 책임의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원청과 하청,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기울어진 권력관계는 늘 재난 상황에서 더 두드러진다. 2015년 메르스 사태 때 응급실 이송요원과 청원경찰 등 대형병원의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안전관리 사각지대에 방치됐고 일부는 확진 판정까지 받았다. 인천공항 검역직원들은 보호장비도 없이 일했다. 정규직이 아니라는 이유로 관리망에서 제외됐다. 

“일터의 분열은 재난을 계기로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고용 형태에 따라 노동자들 사이에 장벽을 세운 탓에 신속한 대응과 일사불란한 관리감독의 빈틈이 생기고 더 큰 피해로 이어진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은 원청이 사업 일부를 도급 준 경우에도 하청 노동자의 안전을 보호할 의무를 지우고 있다. 최 국장은 “이마저도 유명무실할뿐더러, 서비스업이나 학교현장은 관리가 느슨해 사각지대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재난정보 시스템마저 ‘원청 정규직’ 중심으로 짜여 있다. 지난해 9월 경주 지진이 일어난 다음날, 경북 김천역에서 선로 업무를 하는 코레일 하청업체 직원 2명이 KTX 열차에 치여 사망했다. 지진으로 운행이 늦어진 사실을 모르고 작업에 나섰다 변을 당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지진, 화재 등 비상 상황에서의 연락체계에도 ‘인사이더’ 중심의 사고방식이 녹아 있다”고 했다. 불법파견 사실이 드러날까 우려한 기업들이 비상연락망에서 간접고용 비정규직을 제외하는 일도 허다하다. 김 연구위원은 “지자체 재난담당부서가 관할 사업장 원·하청 노동자들의 안전대응을 통합 관리하는 것도 고민해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