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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고 행복하게

가습기 살균제 피해, 남은 이야기와 남은 과제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수정2017-08-13 17:05:02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이은영씨 아들의 편지. | 이은영씨 제공


"저희 엄마처럼 울지 않았으면"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수면 위로 드러난 지 6년만에 피해자들이 국가 차원의 사과를 받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8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의 간담회에서 “오늘 제가 대통령으로서 정부를 대표해 가슴 깊이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또 “그동안 정부는 결과적으로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예방하지 못했고, 피해가 발생한 후에도 피해 사례들을 빨리 파악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면서 “피해자들과 제조기업 간의 개인적 법리관계라는 이유로 피해자들 구제에 미흡했고 피해자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고 정부의 잘못을 인정했다.

문 대통령이 간담회에서 적극적으로 구제하겠다는 의지를 밝히자 국가로부터 그동안 피해자로 인정조차 못받았던 이들은 “이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피해구제에 관한 구체적인 진행상황을 들여다보면 아직은 진척된 것이 많지 않다. 피해자들이 기자에게 전해온 ‘남기고픈 이야기’과 피해자들의 ‘온전한 구제’를 위해 남은 과제들을 정리했다. 

‘코 섬유화’ 피해 인정받지 못한 아들…“이제는 희망 가질 수 있을까요” 

“엄마, 오늘 내 편지 읽었어?” 
“응….”

지난 8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문 대통령의 간담회가 끝난 후 아들은 엄마에게 물었다. 천진난만한 13살 아들을 보며 이은영씨(41)는 “이제 희망을 가져도 될까, 이제는 정부를 믿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씨는 2008년 아들이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갔다가 “애 키우는 집에 가습기도 없느냐”는 의사의 말을 듣고 가습기를 샀다.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에 SK케미칼이 제조한 애경의 가습기살균제 ‘가습기메이트’를 꾸준히 이용했다. 9년이 지난 지금 이씨의 아들은 코가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다. ‘섬유성 골 이형성증’이라는 질환이다. 코 안의 세포가 하얗게 굳어 변해가는 병으로, 의사는 이씨에게 “만약 증상이 뇌쪽으로 진행한다면 신경에 이상이 생기며 눈으로 향한다면 실명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씨 역시 만성 자가면역질환인 루프스와 천식과 폐렴, 비염 등을 앓고 있다.

이씨는 가습기메이트를 오래 쓴 탓에 아들과 자신의 질환이 생겼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하지만 정부가 바늘구멍 같은 피해인정 기준을 고집해온 탓에 이씨와 아들은 ‘가습기살균제 구제 특별법’에 따른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모자는 아무 지원도 없이 9년을 버텨왔다. 지금은 근근히 생계를 잇고 있지만, 훗날 아들의 수술비를 생각하면 가슴에 돌덩이를 올려놓은 듯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씨는 정부가 ‘특정 유형의 폐섬유화’ 이외의 다른 질환도 법적 피해질환으로 인정해달라며 정부 관계자와 전문가를 찾아다니고, 다른 피해자들 사례를 모으면서 몇 년 째 싸움을 벌여왔다. 힘겨운 싸움에 지쳐가던 그는 석 달 전 기자와의 통화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그러다가 8일 대통령과의 만남 뒤엔 기운을 조금 되찾은 듯 했다. 

책임 피해간 SK케미칼 

힘겨워하는 어머니를 지켜보던 아들은 대통령과의 만남 직전에 편지를 썼다. 이씨는 이 편지를 꼭 대통령께 읽어드리고 싶었다. 자신과의 악수 차례가 돌아오자마자 혹시나 편지를 못읽을까봐 ‘저희 아이가 편지를 썼어요’라는 말부터 꺼냈다. 문 대통령은 “이따가 시간을 드릴테니 읽어주세요”라고 했다.

피해자들에겐 약 2분간의 시간이 주어졌다. 문 대통령은 이씨 차례가 되자 잊지 않고 “편지를 읽어달라”고 했다. 아이가 삐뚤빼뚤 손글씨로 쓴 편지를 들고 일어섰는데 자꾸만 눈물이 났다. 눈물 때문에 글씨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씨가 편지를 읽어내려가는 동안, 김은경 환경부 장관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눈물을 훔쳤다. 문 대통령의 눈도 빨개졌다.

SK케미칼 제품을 쓰고 피해를 입었지만 이 회사는 지난해 검찰 수사를 비껴갔다. 2012~2013년 질병관리본부는 ‘원인미상 폐손상’이 일어난 원인을 빠른 시일 안에 밝혀내고 추가피해를 막기 위해 수사발표를 서둘렀다. 가습기살균제 원료였던 PHMG·PHG의 동물 실험결과가 상대적으로 빨리 확인되면서 이 대목부터 발표했다. 이후 CMIT/MIT와 여러 질환의 인과관계는 확실히 규명하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흘렀다.

정부는 지난해에서야 가습기메이트의 원료인 CMIT/MIT의 독성실험 용역을 발주했다. 최종 결과는 올해 말에 나온다. 외국에서는 이미 확인된 CMIT/MIT의 흡입독성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절차를 뒤늦게 시작한 것이다. 정부는 우선 PHMG로 인한 ‘특정유형 폐섬유화’ 질환만 피해기준으로 설정했다. 가해 기업의 “로펌에 꼬투리 잡히지 않고”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이씨뿐 아니라 ‘가습기메이트’ 피해자 여러 명이 SK케미칼의 책임에 대해 언급했다. SK케미칼은 2012~2013년의 질병관리본부 조사결과를 방패삼아 보상은커녕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다.

간담회가 끝나고 집에 왔을 때 이씨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같은 처지의 피해자였다. 수화기 너머로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사과받게 해줘서 고마워요. 내가 잘못해서 우리 애가 아픈 거 아니라는 거, 이제 우리 애한테 얘기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씨가 그동안 정부를 상대로 오랫동안 싸워온 데 대한 감사전화였다.

한동안은 코 섬유화로 점차 변해가는 아이의 얼굴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죄책감에 시달렸던 이씨는 “나도 같은 심정”이라고 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수면 위로 드러난 지 6년만에 들은 대통령의 사과는 이들에게 위로가 됐다.  

“대통령이 제 편지를 읽었대요” 

2015년 폐를 이식받은 안은주씨(49)는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문 대통령과의 간담회에 나오지 못했다. 그 대신 그는 밤새 편지를 써서 다른 참석자를 통해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애초 간담회에서 대신 읽어주기로 했으나 전달만 됐다는 얘기를 듣고 조금은 실망한 터였다. 그런데 이틀 후 안씨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청와대 사회수석실 비서관입니다. 대통령께서 편지를 읽어보시고, 잘 보셨다고, 꼭 최선을 다해서 적극적으로 도움을 드릴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하셨어요. 직접 전화는 못하셨지만 꼭 이런 답변을 전해달라는 지시를 하셨습니다. 지금은 건강에만 꼭 신경쓰시라고 하셨어요.”

아침부터 항생제와 진통제 주사를 맞느라 몽롱한 상태였던 안씨는 전화를 끊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슴이 벅차고 떨리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했다. “드디어 대한민국도 이제 뭔가가 달라지려고 하고 있구나. 과거 정부에선 몇번의 편지를 보냈어도 받았다는 연락 한 번 못받았는데….”

안씨는 배구 국가대표 후보에도 올랐을 만큼 체력이 좋았다. 그런데 2008년~2010년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이라는 살균제를 썼고 2010년 호흡곤란이 시작됐다. 3년 후부터는 산소호흡기를 달았다. 2015년에는 “성공률이 30%”라는 폐이식까지 받았다. 7년 넘게 투병 중인 아내를 간병하느라 남편은 집안의 귀중품을 내다 팔아 생활비로 썼다. 그런데도 수술비용으로 3억원의 빚이 남았다. 그는 앞서 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 삶의 끝이 코 앞에 있는 지금 자식에게 수억의 빚을 남기고는 도저히 억울해 눈을 못감겠습니다”라고 썼다.

▶[전문] "자식에게 수억의 빚을 남기고는 도저히 눈을 못감겠습니다"

안씨는 의료진으로부터 “세포가 너무 강해 다른 장기를 받아들일 수 없어 피를 다 교환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관련 치료를 받은 후 수술을 했지만 이후 새로 받은 피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올 5월에 혈장교환술을 다시 했지만 거부반응은 계속됐다. 그는 “의사선생님들께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늦추고 도와주는 일만을 지금 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폐이식 수술의 성공사례는 아직 많지 않다. 이식 후 6년 가량 살고 있는 이가 가장 오랜 생존자다. 안씨는 “지금 저는 삶의 끝이 코앞에 있다”고 했다.

그래도 안씨는 “연락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고 다시 한번 정부를 믿어 봐야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조금은 힘이 나려 한다”고 했다. 

‘온전한 구제’까지 남은 과제들  

피해자들은 6년여만에 대통령의 ‘사과’를 듣고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구제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는 판정 절차를 통해 1단계(가습기살균제로 인한 질환 가능성 확실), 2단계(가능성 높음), 3단계(가능성 낮음), 4단계(가능성 거의 없음)로 나뉜다. 판정이 완료된 2196명 중 1·2단계 판정을 받은 이들은 388명, 17.6%에 불과하다.

피해인정을 받은 이들이 20%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정부가 아직까지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드러날 당시 사망자가 보인 증상(소엽중심성 폐섬유화, 폐 영상사진의 간유리음영현상, 급성진행 등 특정 증상 모두 충족)만 피해자 인정 잣대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간담회에서 “원진레이온, 고엽제 사례에서도 피해는 다양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가습기살균제 피해 역시 그러할 것”이라면서 “원점부터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지만 아직까지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셈이다. 정부는 특별법상의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한 3·4단계 판정자에 대해서도 “피해자로 인정받은 이들과 거의 같은 수준의”(환경부 관계자) 지원을 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1·2단계 피해자에 대한 구제급여는 정부가 먼저 지급한 후 가해기업에 구상권을 청구해 받아낸다. 특별법은 3·4단계 판정자를 지원하기 위해서도 관련 기업에게 분담금을 부과, 1250억원의 지원액을 ‘구제계정’에 쌓아놓을 계획이다. 문 대통령은 이 구제계정에 정부 예산을 일부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환경부 고위 관계자는 “구제계정 상한액 2000억원 중 부족분 750억원의 30%는 정부가 책임지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설명햇다.

구제계정을 관리하는 구제계정위원회는 9일 3·4단계 피해자 3명에게 3000만원을 긴급의료지원액으로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이미 경제적으로 파탄지경에 이른 상황이다. 구제계정위원회는 다음 회의부터는 3·4단계 피해자 가운데 어떤 기준으로 누구를 지원할지 논의할 계획이다. 7년 가까이 기다려 온 3·4단계 피해자들은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을 기다리며 애태워야 한다.

천식에 대한 환경부의 입장도 오락가락하고 있다. 앞서 환경부는 천식도 가습기살균제 피해질환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9일 발효된 특별법에 따라 구성된 구제위원회는 이 결정을 보류했다. 피해자들은 ‘희망을 가져도 될까’ 하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가해기업 재수사, 소멸시효 없는 징벌제, 구제범위 확대…과제 산적 

환경보건시민센터는 가습기살균제 기업들이 확실히 책임을 지게 하고 피해자 대부분이 ‘구제’에서 밀려나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몇 가지 제안을 한 바 있다. 이들은 일단 수사망을 빠져나간 일부 가해기업에 대해 검찰 재수사 등의 진상규명 과정이 제대로 이뤄져야 하고, 소급적용이 되는 ‘소멸시효 없는 징벌제(5~10배 보상)’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피해자 인정 대상을 폐손상의 경우 1·2단계에서 1~3단계로 일차적으로 확대할 것, 또한 4단계 판정자가 많이 앓고 있는 간질성폐렴과 특발성폐섬유화 등을 피해질환으로 인정할 수 있는 연구를 신속히 추진할것을 요구 중이다.

환경보건시민센터는 아울러 피해인정 질환도 폐에 한정하지 말고 전신질환으로 넓힐 것을 촉구했다. 앞서 특별법이 발효되기 전에 운영됐던 폐 이외 질환 검토위원회의 검토위원이었던 임종한 인하대 교수(직업환경의학)는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된 이후 피부·비강·폐 등의 염증반응 혹은 염증매개물질의 체내 이동 등이 확인되고, 질환이 중증인 경우 가습기살균제 증후군으로 인정하자”는 제안을 했다. 환경보건시민센터도 ‘가습기살균제 증후군’ 개념을 도입해 구제범위를 넓히자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