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국립공원에는 ‘회사거리’라는 이름이 붙은 터가 있다. 산 속에 웬 ‘회사거리’일까. 이 이름엔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가 담겨있다. 오대산에서 벌채한 목재를 가공하는 조선총독부 목재회사가 있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는 목재를 빼내가려고 월정사 앞을 가로지르는 목차레일도 만들었다. 당시 설치됐던 레일의 일부는 아직까지 오대산에 남아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회사거리, 화전터와 목차레일 등 오대산 곳곳에 남아있는 일제의 수탈 흔적들을 공개했다.
일제강점기, 오대산에선 수시로 목재가 실려나갔다. 나무를 베고 산 아래로 나를 노동력이 필요한 일제는 산 속의 화전민을 착취했다. 300여명이 이곳에 살며 벌목에 동원됐다. 국립공원 내 월정사와 상원사 사이 구간에서 당시의 화전민 집터 50여 기를 확인할 수 있다. 화전민 마을은 1975년 오대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때까지도 일부가 남아있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마을 어른들의 증언에 따르면 월정사주변 화전민 마을은 주로 일제강점기에 형성됐고 약 150가구 300여명까지 살았다고 한다”면서 “이들은 산판(벌목) 일이 한가한 여름철에는 숲에 불을 놓아 밭농사를 지었고 겨울철에는 산판 일에 동원됐다”고 밝혔다.
강원 평창 진부면의 김웅기씨는 공단 측과의 인터뷰에서 “(화전민들은) 봄에는 강냉이 심어서 가루를 만들어서 곤드레 나물 뜯어 개죽처럼 쑤어먹고 그랬다”면서 “저희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회사거리의 (목재)회사들이 화전민들 노동력을 많이 갖다 썼는데 임금도 제대로 안주고 툭하면 끌려나가서 매질 당했다고 한다. 저희 아버지도 부역 안 나갔다고 주재소 끌려가서 얼마나 맞았는지 보름을 못 일어날 정도였다고,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화전농가는 1965년만 해도 4만7000여호에 이르렀다. 강원도가 20여만명으로 가장 많았다. 1968년 화전정리법이 공포됐고 정부는 강원도 산간 화전민을 다른 지방에 정착시켰다. ‘화전정리’는 1976년에 끝났다.
□오대산 목재를 실어나르는 데 쓰인 목차레일의 흔적도 남아있다. 18세기의 오대산 월정사 전경을 보여주는 김홍도의 ‘금강사군첩’ 속 그림과 1929년 촬영된 월정사 전경을 비교하면, 월정사 앞에 목차레일이 설치된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목차레일은 오대산 선재길 일대에 10m 정도 남아 있다.
나무를 베고 나르는 데 동원돼 가며 여름엔 화전으로 생계를 이은 노동자들의 삶은 힘겨웠다. 이들이 남긴 노동요 ‘목도소리’는 아직도 오대산 일대에서 구전으로 전해진다. 2목도, 4목도, 6목도, 8목도 등으로 구분되는 이 노래들은 공동으로 목재를 운반할 때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계곡에 나무를 쌓아 물을 막았다가 비가 내릴 때 보를 무너뜨려 목재를 옮기기도 했다. 오대산 ‘보메기’는 바로 이런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일제가 소나무에서 송진을 채취한 흔적도 남아 있다.
오대산국립공원사무소는 일제강점기의 자연자원 수탈과 화전민터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이달부터 지표조사를 추진하고 있다. 지표조사는 땅 위나 수중에 노출된 유물 혹은 유적의 분포를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역사·민속·지질·자연환경에 대한 문헌조사·현장조사 등이 이뤄진다. 사무소는 조사결과를 토대로 현황도를 작성해 화전민터 관리방안과 발굴·복원사업의 방향을 정할 예정이다.
정정권 오대산국립공원사무소장은 “이번 조사는 세월이 많이 흘러 사라져가는 일제의 수탈 흔적을 발굴·보존하려는 것으로, 후세를 위해 시대의 아픔과 치욕을 잊기보다 뚜렷하게 기억하려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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