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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고 배우기

어린이집·유치원 영어 수업 금지에 반발하는 부모들, 왜?

서울시내 한 서점에서 아이들이 영어 동화책을 읽고 있다. 정부의 영유아 영어수업 금지 방침을 둘러싸고 조기 영어교육의 효과를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시내 한 서점에서 아이들이 영어 동화책을 읽고 있다. 정부의 영유아 영어수업 금지 방침을 둘러싸고 조기 영어교육의 효과를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아이들의 영어 실력이 대학 진학이나 취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게 현실입니다. 그나마 공평한 유치원과 어린이집 방과후 영어교육을 굳이 없애려 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습니다” 새해 청와대 청원게시판에는 이런 내용의 ‘어린이집·유치원 영어수업을 금지하지 말아달라’는 청원이 쏟아졌다.

초등학교 1~2학년 아이들에 대한 방과후 영어수업이 금지되면서 정부가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영어 특별활동도 금지하기로 한 사실이 알려지자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교육부는 일선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방과 후 특별활동 형태로 실시하는 영어수업을 금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어린이집을 관할하는 보건복지부와 협의해 이달 중으로 구체적인 일정과 방법을 결론내릴 계획이다. 흔히 ‘영어유치원’이라고 불리는 유아대상 영어학원도 규제안을 마련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교육공정성이 무너진다”

하지만 이런 조치를 보고 “그렇다면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지 않겠다”는 학부모는 많지 않다. 최대한 빠른 시기에 영어에 노출돼야 학습효과가 좋다는 인식이 학부모들 사이에 퍼져 있고, 입을 막 떼기 시작한 돌쟁이 아기를 대상으로 한 영어교재도 팔리는 것이 현실이다. 

육아정책연구소의 2015년 전국보육실태조사를 보면 어린이집에 다니는 만 1~2세 영아들의 18.8%가 영어 특별활동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만 3~5세 아이들로 올라가면 영어 특별활동을 하는 아이가 어린이집에선 59.7%, 유치원에선 46.9%다. 기관에 다니는 유아의 절반이 영어를 배우고 있는 셈이다. 영유아를 키우는 부모들의 25.6%는 어린이집과 유치원 특별활동 중 영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체육(30.9%)에 이어 두 번째다. 만 3~5세 아이들 부모 중에서는 영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29.7%로 체육(27.8%)보다도 높았다. 

소위 ‘영어 몰입교육’을 실시하면서 유치원과 비슷한 교육과정을 채택한 유아대상 영어학원들, 일명 ‘영어유치원’들은 비싼 원비에도 불구하고 2015년 376곳에서 2017년 474곳으로 늘었다. 서울시내 한 국공립어린이집 원장은 “특별활동 수요조사를 해보면 엄마들이 1순위로 원하는 과목이 영어”라며 “조기 영어교육이 큰 효과가 없다는 것을 부모들에게 먼저 설득하지 않고 이대로 영어수업을 없애버리기면 학부모들은 당연히 학원으로 몰릴 것”이라고 말했다.

어린 자녀에게 영어교육을 시켜야만 한다고 믿는 부모들은 어린이집·유치원의 영어수업 금지를 ‘정의’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비싼 사교육은 규제하지 못하면서 저렴한 어린이집·유치원 방과후수업만 막는 것은 공정한 기회를 박탈하는 일이라는 논리다. 교육부가 유아대상 영어학원의 수업시간과 내용을 규제하기로 했지만, 사교육을 규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아예 영어 중심으로 운영되는 학원은 규제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루 한두시간짜리 단기 수업을 막을 방법은 사실상 없다. 일찌감치 아이들을 데리고 해외유학을 떠나는 부모들을 막을 길도 없다. 

반면 정부의 보육·교육과정을 따르는 어린이집과 유치원 영어수업을 규제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그렇다고 부모들이 영유아 영어교육을 포기하기에는 영어가 대입과 취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다. 젊은 부모들은 어떤 세대보다도 영어의 중요성을 절감하며 학창시절과 대학시절을 보낸 세대이기도 하다.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글을 쓴 학부모는 “일반인들 접근 가능한 부분만 규제하고 막상 진짜 부자들이나 기득권들이 이용하는 국제학교에는 아무 규제를 안 하지 않나”라고 꼬집었다. 또다른 학부모는 “서울 서초구나 강남구 등 상당수 중산층 이상 가정은 대부분 영어유치원부터 보내고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영어학원에 보낸다. 저소득층 아이들이 학원 대신 저렴한 방과후를 통해 원어민 영어에 자연스레 노출됐는데, 이걸 없애면 저소득층 부모들도 한달 30~40만원 하는 학원을 보내야겠냐”고 했다.

일찍 가르치면 정말 효과 클까

전문가들은 ‘일찍 영어교육을 하면 자연스레 영어를 잘하는 아이로 클 것’이라는 기대에는 근거가 없다고 지적한다. 육아정책연구소는 2015년 외국어 조기교육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만 5세와 초등학교 3학년, 대학생으로 구성된 세 집단에 한 달 동안 20차례에 걸쳐 기초적인 중국어를 가르쳤다. 영어 대신 중국어로 한 것은 영어를 배운 적이 없는 이들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달 뒤 피실험자들의 중국어 실력을 시험하고, 안구운동과 뇌파를 측정해 세 집단의 중국어 듣기·말하기·읽기 능력 차이를 비교했다.

실험 결과, 모든 영역에서 가장 수업효과가 낮은 것으로 나타난 집단은 만 5세였다. 반면 교육의 효과가 가장 높았던 집단은 대학생이었다. 교육 전후를 비교했을 때 듣기와 읽기 능력은 대학생 집단에서 가장 많이 향상됐고, 말하기 능력은 초등학교 3학년이 대학생보다 조금 더 좋아졌다. 흔히 언어교육의 적기라고 생각하는 만 5세 집단의 언어습득 능력이 실제로는 가장 떨어진다는 결론이 나온 셈이다. 연구진은 “외국어 학습은 취학 전 유아에게는 큰 효과가 없을 수 있고 그나마 듣기 중심의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학습을 하게 하는 편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문가들은 영유아 시기의 외국어 학습은 효과가 전혀 없다고 말한다.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는 “다섯살 또래 아이들은 주변 어른들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언어를 배운다. 영어 노래를 듣거나 TV 속 영어 문장을 따라하는 것처럼 상호작용이 없이 영어를 접하면 언어 습득 효과가 크게 떨어진다”며 “인위적 학습을 할 수 없는 연령대”라고 말했다. 

영어유치원들은 그 틈을 비집고 ‘영어에 자연스럽게 노출시킨다’는 점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런 학원들도 읽고 쓰거나 듣고 따라하는 학습 위주의 교육과정을 짠 경우가 많아 어린 아이들에게 지나친 학습부담만 준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한 유명 체인 학원의 하루 시간표를 보면 아이들이 오전 9시30분부터 원어민교사와 대화를 하고, 11시부터는 영어책을 읽고 파닉스(발음교육) 수업을 한다. 오후 2시 이후에는 ‘애프터스쿨’이라는 이름의 보충수업 시간이 마련돼 있다. 지난해 7월 교육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서울시내 반일제 이상 유아대상 영어학원을 조사해보니 하루 평균 수업시간이 5시간7분이었다. 초등학교 수업 시수로 환산해보면 7.7교시에 해당한다. 중학생의 하루 평균 수업시간인 4시간57분보다도 길다. 

유치원 교사들도 너무 이른 나이에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는 것은 오히려 인지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김수진 서울 상도유치원 원감은 “유치원에 다니는 연령대인 만 3~5세는 아이들의 모국어 능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시기”라면서 “이 시기에 영어를 지나치게 가르쳤다가 오히려 모국어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를 많이 경험했다”고 했다. 김 원감은 “학부모들 사이에 영어교육 수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영어를 가르치는 것은 좋지 않으니 차라리 초등학교 3~4학년 때 영어에 더 집중하시라고 조언하곤 한다”고 말했다.

영유아 영어 사교육 시장이 커지는 동안 정부는 조기 영어교육에 대한 어떤 철학도, 가이드라인도 없이 갈팡질팡해왔다. 정부가 이번 논쟁을 계기로 이제라도 언어교육의 철학을 고민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이병민 교수는 “이중언어 환경이 아닌 한국에서는 모국어를 먼저 공부하고 그 다음에 영어를 하는 것이 정상이다. 영어는 어차피 평생 연습해야 것이지 언제 어느 시기에 시작하는 것이 좋은지는 아무도 잘라 말할 수 없는 문제”라며 “그동안 아이들에게 언어공부를 어떻게 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국가적인 철학이 부재했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