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즈음의 일이다. 2년차 직장인이던 ㄱ씨(34)는 또래 동료 둘과 함께 직장상사와 술을 마셨다. 얼굴이 달아오를 때쯤 상사는 옆에 있던 여자 동료의 등을 자꾸 쓸어내렸다. 손으로 허리를 감싸기도 했다. 명백한 성추행이었지만 ㄱ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문제를 제기하면 우리 모두가 불이익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해 버리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머뭇대는 사이 술자리는 끝났다. 다음날 ㄱ씨는 동료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불편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의 성추행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8년 전의 이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건 피해자의 용기 있는 고백이었다.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달기를 비롯해 특정 직종·직업군 내의 성폭력을 고발한 여성들, 세계에 번진 ‘미투(ME TOO)’ 운동 등 성폭력 문제를 의제화한 이들은 그동안 늘 피해자였다. 그러나 성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만의 사건이 아니다. 상당수의 성폭력 현장엔 목격자가 있다.
피해자들이 어렵사리 만든 변화에 힘입어 목격자들의 태도도 달라지고 있다. ㄱ씨는 서지현 검사의 폭로를 접하고 4년 전 사건을 곱씹어 본다. 그는 “앞으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정색을 하고 상사가 잘못을 느낄수 있게 분위기를 만들겠다”고 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의 노력은 방관해왔던 이들의 자성과 연대의 움직임을끌어내고 있다.
피해자 ‘미투’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목격자들이 적극적으로 성폭력을 막기 위해 개입하자는 ‘미퍼스트(MeFirst)’ 운동도 눈길을 끈다. 문유석 서울동부지방법원 판사는 30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안 전 검찰국장의 성추행을 여러 검사들이 지켜보고만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는 “한 명이라도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하며 제지한다면 이런 일은 없다. 나부터 그 한 사람이 되겠다”고 썼다. 그리고 ‘#Me First’라고 해시태그를 붙였다. 검찰에서도 곪은 상처를 드러낸 검사에게 보내는 응원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목격자의 한마디가 범죄 막는다
조직 내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직장 내 성희롱 등에선 주변 동료들의 ‘반응’이 가해자를 제어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가부장적이고 마초적인 문화, 상하관계와 조직 논리 속에서 피해자들은 고립감을 느끼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때가 많다. 주변 동료들이 불이익을 우려해 함께 맞서지 못하거나 ‘피해자들의 과민반응’ 정도로 치부할 때, ‘다수의 침묵’은 말 없는 항변이 아닌 ‘공동 가해’가 될 수 있다. 반대로 목격자의 개입은 성폭력을 막거나 더 큰 폭력으로 가는 것을 예방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되기도 한다.
2014년 목격자 중심의 성폭력 예방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교육안을 만든 권김현영 성공회대 외래 교수는 “목격자가 ‘뭘하는 것이냐’ ‘내가 보고 있다’고 개입하는 것이 성폭력을 중단시키는 효과적이고 빠르고 실질적인 방법”이라고 지적한다. 물론 성추행 현장의 목격자가 나서는 일이 쉽지는 않다. 피해자의 편에 서서 목소리를 냈다가 실제로 불이익을 당한 사례도 많다. 2000년 동국대에서 교수가 제자를 성추행해 파면당한 사건이 있었다. 피해자 편에서 진상을 밝히려 했던 한 여성 사회학자는 이 과정에서 동료 교수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 교수 발목을 잡느냐” “그런 일로 교수직이 날아가면 남는 남자 교수 없다”라는 면박을 여러 차례 들었다. 가해자는 적반하장으로 여성 사회학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가해자의 동문 교수들은 파면을 막기 위해 집단 탄원서를 써 줬고, 가해자는 교육부의 재심을 통해 강단에 복귀했다.
침묵은 ‘공동 가해’…주변의 개입, 가해자 제어에 큰 힘
목격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문턱이 높은 또 하나의 이유는 현장의 동료 역시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가해자 앞에서는 ‘을’인 경우가 많은 탓이다. 금융회사에서 일하는 ㄴ씨(34)는 지점장이 여직원에게 귓속말을 한다든가 손을 잡는 것을 자주 봤다. ㄴ씨에게 고민상담을 해 오는 직원도 있었지만 그는 한번도 직접 나서 제지하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는 “문제제기를 한다 해도 힘 있는 지점장은 계속 살아남기 때문에 불이익이 어떤 식으로 돌아올지 모르겠다”면서 “너무 잦아서 매번 개입하기도 어렵다”고 털어놨다. 일상을 지배하는 권력관계는 피해자뿐 아니라 목격자마저도 움츠러들게 한다.
최근 현대글로비스에서는 사장이 사원들과의 회식에서 부적절한 발언을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문제제기는 상황종료 후 스마트폰 익명 애플리케이션인 ‘블라인드’를 통해 터져나왔다. 현행법상 모든 노동자는 성폭력 예방교육을 받아야 한다. 직원들은 댓글에서 이런 법규를 들며 사장을 비난했지만, 이 기업의 예는 성폭력 예방교육이 ‘갑’의 행동을 교정하는 데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몰라서’가 아니라 우월적 지위 덕에 용인되기 때문에 저지르는 것이다. 권김현영 교수는 “이런 경우 업무 현장을 리드하는 중간관리자가 ‘우리 부서는 이런 문화가 아닙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위에서 내려오는 고위직들의 행동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같은 ‘을’ 위치의 목격자의 개입이 활발해지려면 조직문화의 변화가 선행돼야 한다. 최선혜 한국여성의전화 부설 여성인권상담소 소장은 “조직의 리더들이 문제해결 의지를 보일 때, 그리고 조직 내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해보는 경험을 가질 때 ‘말할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서울에 사는 6년차 직장인 ㄱ씨는 몇년 전 회식자리에서 상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다음날 인사관리자를 찾아가 사건을 알렸고, 가해자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동료들은 큰 힘이 됐다. “충격이 컸을 것”이라며 ㄱ씨를 지지했고, 가해자는 부서원 모두의 앞에서 사과했다.
여성 직장인 ㄴ씨는 술자리에서 상사가 젊은 여성 직원에게 춤을 추자며 신체접촉을 하는 걸 봤다. ㄴ씨는 여성 직원에게 다가가 “춤은 나와 함께 추자”며 다른 쪽으로 이끌고 갔다. 남성 상사는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걸 스스로 눈치챘다.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12월 “성폭력 예방교육보다도 더 효과적인 것은 목격자들의 개입”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목격자의 작은 행동은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 가해자에게 그 자리에서 항의할 경우 갈등이 더 심해질 것 같으면 “그런 농담 재미없어요”라는 식으로 부드럽게 제동을 거는 편이 좋다. 갑자기 책을 떨어뜨린다거나 피해자를 다른 곳으로 불러낼 수도 있다.
소극적으로 행동을 중단시키는 것을 넘어, 좀 더 ‘공론화’하는 방향으로도 나아가야 한다. “알고 있었어? 이거 나만 본 거야?”라며 다른 동료들에게 공개적인 곳에서 가해자의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피해자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됐어. 괜찮아?”라고 물어보거나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것, 인사담당부서에 알리거나 가해자의 사과를 받으려는 피해자와 동행해주는 것도 도움을 주는 방법이다.
미국의 대학이나 군대, 시민단체에서는 직장 내 구성원들을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양분하는 대신에, 목격자가 됐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 실질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목격자 교육’이 늘고 있다. 이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성희롱이나 성적 공격을 목격했을 때 이를 막기 위한 행동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목격자들의 대응은 성희롱이 직장 내에서 더욱 심한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막는 수단이기도 하다. 로버트 엑스테인이라는 연구자는 “가해자들은 대개 부적절한 농담과 신체접촉을 여러 차례 하면서 어디까지 용인되는지 시험해 본다”면서 ‘당신이 ○○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들었는데 왜 그랬어요?’라고 물어봄으로써 더 이상의 공격적인 행위를 예방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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