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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야

‘회사’가 ‘군대’와 만났을 때...행군, 각서, 한국 직장의 군사문화

송윤경 기자


피임약까지 동원한 KB국민은행의 행군 프로그램을 계기로 직장 내 군사주의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최근 기업문화가 수평적 관계와 대화·협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직장은 군대’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까라면 까’ 식의 상명하복과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문화 속에 ‘노동자들의 몸’은 도구로만 쓰인다. 특히 임신·출산과 관련돼 있는 여성의 몸은 폭력적인 문화의 피해자가 되기 쉽다.

KB국민은행 신입사원 ‘100㎞ 행군’...여성 직원에게 피임약 나눠줘 물의

대표적인 예가 최근 불거진 KB국민은행의 ‘신입사원 행군’이었다. 이 회사는 신입 직원들에게 100㎞ 행군을 시키면서, 여성 신입 직원들의 생리주기와 겹치지 않도록 피임약까지 지급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을 불렀다. 은행 측은 “희망자들에 한해서 지급한 것”이라고 했지만, 생리주기를 억지로 바꾸는 호르몬제제까지 먹어가면서 신입 직원들이 행군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앞서 대구가톨릭대병원은 간호사들이 임신을 하면 ‘야간근로에 동의한다’는 각서를 사실상 강제적으로 받은 것으로 알려져 거센 비판을 받았다. 가톨릭은 낙태를 죄악시하고 생명을 소중히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정작 가톨릭 계열 병원에선 아기를 가진 여성들이 유산 등의 위험을 무릅쓴 채 일을 해야 했다는 제보가 잇따랐다. 부엌가구 제조업체 한샘에서는 성폭행 피해자에게 거짓 진술을 강요한 사실이 드러났다.

군사주의 문화가 극단적으로 드러난 사례가 입방아에 오르면 사측은 으레 ‘강요를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한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강압이 아니더라도 ‘개인보다는 회사가 우선’이라는 조직 이데올로기가 군사주의 문화와 결합하면서 벌어진 일들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성범죄가 일어나도 ‘회사의 위신’이 먼저이고, 임신을 해도 ‘병원 사정’이 먼저이고, 입사하자마자 은행 일과 상관없는 행군 같은 통과의례를 거치게 하는 것이 모두 그런 사례들이다. 

임신한 간호사 ‘각서’ 받고 야간노동 시킨 대구가톨릭대병원

개인의 신체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폭력적인 조직문화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여성들이다. 여성 직장인 ㄱ씨는 “남성들은 전날 술을 진탕 마셔서 몸이 안 좋다고 자랑하듯 떠들지만 여성들은 법으로 정해진 생리휴가도 쓰기 힘들다” “생리통이든 무엇이든 몸이 아파도 티를 내선 안 되는 곳이 직장”이라고 했다.

기업이 아닌 일터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계속된다. 독립영화를 찍는 박효선씨는 “수개월 철야작업을 해온 여성스태프가 생리통 때문에 조금 쉬겠다고 말하면 선배들은 촬영 일정에 지장이 없는데도 ‘왜 이렇게 약해빠졌냐’ ‘왜 못 견디냐’며 면박이나 눈치를 준다”고 했다. 

신체적인 문제가 불거지면 ‘유약한 구성원’이 돼 버리고, 개인의 특수한 사정이 거론되면 ‘조직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승진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출산날이 다가올 때까지 배가 튀어나오지 않도록 감싸 임신을 숨겼다’는 식의 ‘무용담’은 여전히 나돈다. 

재미 사회학자인 미국 바서대의 문승숙 교수는 한국의 ‘개발독재’ 기간에 노동자의 몸, 특히 여성의 몸을 ‘부국강병’이라는 목표에 맞춰 산업에 통합시킨 것이 이런 문화의 뿌리라고 지적한다. 그는 저서 <군사주의에 갇힌 근대>에서 “병역을 마친 남성이 가장 중요한 노동력으로 인정받는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졌고, 기업이 군대 같은 방식으로 노동자의 몸을 통제하는 것이 당연시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군사주의의 뿌리를 멀리 일제강점기에서 찾는 학자들도 있다. 연세대 여성학 강사 김엘리 박사는 “해방 이후 미군이 들어와 군 체제가 미국식으로 바뀌었을지 몰라도, 군대의 조직운영 문화는 강한 국가를 열망한 일제 군대의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김 박사는 “조직의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고문관’ 등으로 부르며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태도”가 그런 데에서 연유했다고 말했다. 

남성적인 힘을 강조하는 군사주의 문화에서 고통받는 것은 남성들도 마찬가지다. 대기업 영업사원으로 6년째 근무 중인 ㄴ씨(33)는 상사가 늘 여성 직원은 빼놓고 자신에게만 음주를 강요하는 현실을 털어놨다. 상사는 술자리를 빌려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해주기도 했다. 그는 “상사가 해준 얘기들이 업무에 적잖이 도움이 됐기 때문에 여성 동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지만 술 때문에 몸이 망가진 것을 생각하면 그리 고마운 기억은 아니다”라고 했다. ㄴ씨는 “남성들은 대개 군대를 다녀왔으니 군말 않고 시키는 대로 할 것이라는 생각을 상사들이 하고 있어서,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게 힘들었다”고 했다. 

군사주의는 기업의 경쟁력을 악화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지난해 갤럭시노트7 생산 중단 사태가 빚어진 삼성전자에 대해 미국 뉴욕타임스는 전직 삼성전자 직원들의 말을 인용해 “고위직들의 명령이 내려오면 반드시 따라야 하는 군대문화가 사태를 초래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