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신고를 했든 하지 않았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사람들은 ‘가족’이고, 세상에 태어난 아이가 고통 없이 자라게 하는 것은 이 가족과 사회 모두의 몫이다. 김 대표는 아이를 낳아 키우는 첫 36개월이 미혼모와 아이에겐 ‘골든타임’이라고 말한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를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 아이를 선택하면 갈 곳이 없어요
이제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됩니다. 10여년 전 처음 만난 엄마들이 이제 다들 아이를 제법 키웠어요. ‘힘들다.’ 이 말을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할 수 없던 사람들이 모여 어려움을 나누고 부둥켜안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얼마 전 광주에서 20대 여성이 아기를 낳은 뒤 ‘주웠다’고 경찰에 거짓 신고한 일이 있었지요. 이런 가슴 아픈 일은 이제 더는 없었으면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아이 낳는 것을 비난하지 않는 사회가 돼야 해요.
열 달을 품어온 아이를 버리려니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 것이라는 공포가 어마어마하죠. 아이는 혼자 만든 게 아닌데 책임을 오롯이 홀로 져야 하는 상황이면 더합니다. 실제로 미혼모 중에는 부모와 관계가 끊어진 사람이 많아요.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 부끄러워 아예 아는 이들이 없는 곳으로 이사한 사람도 많죠.
몇 해 전 한 엄마가 협회에 연락을 해왔습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아직 출생신고가 안돼 있다고, 일면식도 없는 우리에게 인우보증(隣友保證)을 서달라고 했어요. 임신한 걸 알고는 산에 들어가 혼자 아이를 낳고 나왔답니다. 잘나가는 전문직 종사자인데 직장에 알려지면 타격이 크다고, 출생신고도 못하고 일곱 해를 키운 거예요(인우보증 출생신고제는 출생증명서가 없을 때 성인 2명을 보증인으로 세워 출생신고를 할 수 있게 한 제도로, 2016년 폐지됐다).
김도경 한국미혼모가족협회 대표가 지난해 5월13일 서울 월드컵 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열린 제17회 여성마라톤대회 행사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 한국미혼모가족협회 제공
무책임하게 낳아놓고 누구더러 책임을 지라는 거냐, 미혼모를 지원해달라고 하면 흔히 이런 반응이 나옵니다. 그런데 엄마들은요, 설령 제대로 된 일자리가 있었더라도 아이를 선택하면 돌아갈 데가 없습니다.
결혼한 여성도 출산 후 직장에서 불리해지는 게 현실이잖아요. 비혼 상태에서 임신하면 회사에서 잘리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제약회사에서 해외 지부장까지 맡을 정도였는데 혼자 아이를 낳으면서 회사를 떠나야 했던 회원도 있습니다. 임신한 걸 알게 된 상사가 “당신같이 부도덕한 사람하고는 같이 일할 수 없다”고 했다더군요. 그런데 이게 정말 부도덕한 일인가요?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것일 뿐이잖아요. 낙태하면 죄를 묻는 나라에서, 아이를 책임진 여성도 죄인 취급을 하다니요.
사실 저는 그 사람과 결혼할 줄 알았습니다. 만나고 얼마 안돼 아이가 생겼는데 키우자고 결심했죠.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더니 “세금이 많이 밀려서 혼인신고를 하면 당신 수입까지 다 차압당한다”고 하더군요. 혼인신고를 미루고 아이부터 낳았는데, 알고보니 그에겐 다른 여성이 있었습니다. 애 아빠가 잘돼야 한다는 생각에 빚까지 내 사업자금도 대준 후였습니다. 관계를 정리하니 아기와 빚이 남았습니다.
■ ‘결혼=엄마의 자격’, 10대 부모는 막막
저는 인터넷으로 여행상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일을 했어요. 아이 낳기 직전까지 일하고 아이 낳은 직후부터 다시 일했어요. 빚 갚고 돈 버느라고 새벽 1시든 4시든 전화가 오면 5000원 한 장이 아쉬우니 친절하게 다 받았어요. 24시간 오픈 여행사로 소문날 정도였어요. 한 손으로 아이를 안아 젖을 물리고, 남는 손으로 전화를 받고 자판을 두드리는 날이 계속됐어요.
“네가 뭐하러 이런 고생을 하냐. 그만 아빠한테 아이 갖다줘버려라.” 살이 쪽 빠져 해골이 된 저를 보고 가족들이 말했어요. 아기 얼굴을 부모님 앞에 들이대면서 제가 그랬어요. 이렇게 예쁜 새끼를 어떻게 갖다주냐고.
저는 개인사업을 하는 사람이라 그나마 먹고살 길이 있었으니 천만다행이었죠. 직장인이었다면 정말 막막했을 것 같아요. 몇 해 전 ‘미혼모에게도 출산휴가를’이라는 캠페인을 했어요. 회원 한 명이 출산휴가를 신청했는데 직장에서 거부당했습니다. ‘임신한 여성 누구나’ 출산휴가를 쓸 수 있게 돼 있는데, 혼인하지 않은 여성은 임신조차 인정을 받지 못해요. 하지만 혼전 임신을 해도 ‘결혼할 예정’이라고 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요샌 “혼수 미리 했네” 하면서 동료들이 축하도 해주잖아요. 그런데 왜 아직도 결혼 여부가 엄마 자격의 잣대가 되는 걸까요.
이혼, 사별, 조손 가정과 함께 ‘한부모 가정’ 지원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다른 한부모에게 “지원 더 받으려고 미혼모 됐느냐”는 말을 들은 적도 있어요. 그럴 때면 부모가 함께 사는 가족이 아닌 우리 안에서까지도 결혼 여부를 기준으로 ‘서열’이 있는 것인가 하는 기분이 듭니다. 혼인신고가 아니라 아이를 중심에 놓고 생각할 수는 없는 걸까요.
10대 청소년이 아이를 가지면 상황은 더 심각합니다. 정부 지원은 기본적으로 주민등록증이 있어야 받을 수 있어요. 그런데 주민등록증을 받는 것도, 정부의 미혼모자시설에 들어가는 것도, 임신한 사람 누구에게나 발급되는 국민행복카드를 받는 것도 부모의 동의를 얻어야 해요. 출생신고도 ‘성인’인 부모 동의 없이는 못합니다. 학교 밖 청소년들은 부모와 관계가 끊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아이들에게 “부모님 모시고 와라” 하면 그야말로 오갈 데가 없어요. 아이가 생겼는데 아르바이트도 부모가 허락해야 할 수 있고요. 그러니 돈을 벌려고 최저임금도 안 주는 곳에 가죠.
밥 사먹기도 힘든 형편인데 어느 날 친구가 말합니다. ‘하루만 나가서 술 따르면 30만원 번다더라.’ 혹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나쁜 성인들에게 꼬임을 당하는 일도 빈번합니다. 집 계약도 제 이름으로 못하니 “내 이름으로 계약해줄게” 하며 접근하는 어른을 믿고 알바해서 모은 돈을 보증금으로 넘깁니다. 어느 날 상대는 사라지고 없지요.
만 19세가 안됐어도 민법에서는 결혼을 하면 성년으로 간주합니다. ‘성년의제’라 해서, 부모 동의 없이도 혼자 법적인 행위를 할 수 있죠. 그런데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으면 출생신고도 못하고 보호시설에도 못 들어갑니다. 아이들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과 상관없이 아이를 낳으면 성인에 준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길을 열어줘야 합니다.
■ 36개월만 도와주면 어떻게든…
아이를 좀 키워둔 엄마들끼리 이런 얘기를 해요. 36개월만 버티면 된다고,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아이가 어릴 땐 잔병치레가 잦고 손도 많이 가요. 맡아줄 데도 찾기 어렵죠. 아기 돌보랴, 직장 알아보랴 혼자 동동거리다 몸도 망가지고 마음도 불안해지면 ‘번아웃’이 와요. 정말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이때 그만 나가떨어져 아이를 입양 보내거나 시설에 맡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정부는 지금 미혼모에게 한 달 13만원(24세 미만 청소년 한부모는 18만원)을 아동양육비로 지원합니다. 기저귀·분유값만 생각해도 턱없이 부족한 액수죠. 그런데 최저임금 156만원을 넘는 소득이 있으면 이마저 못 받아요. 기초생활수급은 문턱이 높고요. 다행히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더라도 1년이 지나면 취업준비를 하라는 요구가 들어옵니다. 24개월까지는 키워야 아이를 맡기고 일을 알아볼 여력이 좀 생겨요. 이때까지는 주변에 솔직하게 자신의 처지를 말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요. 이 고비를 잘 넘기면 엄마와 아이가 같이 성장할 수 있어요. 우리 협회 엄마들 중에는 아이를 낳은 뒤 공부해서 공무원이 된 이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출산 초기부터 36개월만 도와주면 엄마들이 어떻게든 일해서 살길을 찾으려고 노력하거든요.
미혼모를 시설에 수용하고 관리하는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보호시설도 필요하지만, 엄마들 대부분은 다른 가정처럼 아이와 함께 자기 집에 살고 싶어 해요. 그런데 주거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죠. 이것도 결혼과 관련돼 있어요. 신혼부부는 ‘버팀목대출’을 통해 전세자금을 최저 1.2%의 금리로 빌릴 수 있습니다. 결혼 예정자도 포함되죠. 하지만 우리에겐 아닙니다.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있는 예비부부에게 주는 권리가 왜 이미 아이를 낳은 가정엔 없는 걸까요.
따져보면 미혼모에게 ‘아이를 키워서는 안되는 여자’ ‘부도덕한 여자’라는 프레임을 씌운 주범은 바로 국가입니다. 한국전쟁이 끝났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전쟁고아를 입양 보냈다 쳐도, 사실 아이들을 해외로 가장 많이 보낸 시기는 경제가 한창 발전하던 1980년대입니다. 민간에 입양을 맡기고 아이들을 ‘팔아넘긴’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열악한 공장에서 산업 역군으로 일하던 여공들이 아이를 낳으면 ‘키울 능력 없다’며 입양 보내게 했어요. 아이를 기를 방법을 마련해주지 않고, 입양 보내라고 국가가 등을 떠민 셈입니다.
■ 아기 버리지 않게 ‘정보’를 주세요
갓난아기를 몰래 두고 가는 베이비박스 앞에서 ‘잠복근무’도 많이 했어요. 울산에서, 천안에서, 베이비박스가 있는 서울 관악구의 교회까지 아이를 놔두러 옵니다. 여기 두면 적어도 아기가 죽지는 않을 테니까요. 이분들을 붙잡고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보 부족이 심각합니다. 주민센터나 보호시설에서 한두 번 지원을 거절당하면 좌절한 채 시간을 보내다 산달이 닥쳐요. 조그만 버팀목이라도 있으면 아이를 키우는 쪽으로 마음을 돌리는 사람이 훨씬 많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약국이나 보건소, 주민센터…. 준비되지 않은 임신을 겪는 사람에게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입양기관 정보나 베이비박스 위치보다는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면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더 먼저 알 수 있게 해야 해요. 임신한 게 어때서요. 아이 낳아 기르는 사람은 용기 있다고 사회가 칭찬해줘야 됩니다. 낙태를 생각하고 상담하러 왔다가 저희가 아이를 키우는 것을 보고 마음 돌린 사람도 많아요. 베이비박스 앞에서도 얼마나 많은 엄마들이 마음을 바꾸는데요.
이번 연휴에 저는 아들과 ‘설 캠프’에 갑니다. 명절마다 협회에서 여는 행사인데 이번엔 서른 가정이 참여합니다. 그믐날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전통문화 체험을 하고, 설날 아침엔 다 같이 떡국을 먹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주변에도 많이 알려주세요. 혼자 아이를 책임지는 사람에게, 정부가 적어도 다른 한 부모 몫은 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기르는 건 두 사람이 함께해도 벅찬 일이잖아요. 지금은 나라에서 할 몫도 가정이 다 책임지니까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아이 키우기 좋은 세상이, 결국 모든 가정이 아이 키우기 좋은 세상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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