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운 사람을 피하던 조마조마한 슬픔을 견디고 싶지 않아 자퇴하려는 결심이었습니다. … 글쓴 지 8시간 만에 자퇴서를 고쳐 씁니다.”
서지현 통영지청 검사가 8년 전의 성추행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린 다음날, 한양대 대학원생 ㄱ씨는 페이스북에 ‘#MeToo’ 해시태그와 함께 지난해까지 자신이 겪었던 일을 공개했다. 그는 대학원에 다니면서 강사로부터 “단둘이 만나고 싶다, 열렬한 관계가 되자”는 등의 발언을 들었다. 손을 잡거나 신체를 접촉하기도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담당교수는 “별 뜻 없이 순수하게 좋아해서 그런 건데 나이도 든 여자가 오해가 크다”며 학교에 진정하지 말라고 압박했다. 담당교수는 강사와 친한 사이였다. 불이익을 주겠다는 유무형의 압력에 ㄱ씨는 사건을 이제까지 공개하지 못했다.
서 검사의 용기 있는 폭로 이후 성폭력 피해자들의 ‘미투(나도 당했다)’ 선언이 쏟아져나온다. 경찰대를 나와 경찰청에서 일하다 탐사보도 전문매체 뉴스타파로 이직한 임보영 기자는 “경찰청 재직 때인 2015년 12월 직속상사에게 성희롱을 당했지만 가해자는 징계받지 않았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이효경 경기도의회 의원(더불어민주당)은 “6년 전 회식차 갔던 노래방에서 한 동료 의원이 내 앞에 오더니 바지를 벗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서 검사는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데 8년이 걸렸다”고 했다. 검사인 그조차 8년이나 피해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불이익을 감내해야 했던 이유는 분명하다. 피해 사실을 공개하는 것이 조직을 공격하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가해자가 처벌받더라도 피해자는 보호받지 못하는 조직 구조와 문화가 촘촘히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장 내 성범죄 피해 사실을 공개하는 것은 곧 조직의 문제를 들춰내는 ‘내부고발’로 받아들여진다. 다른 범죄들과 달리 성범죄는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내부에조차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에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잘못된 사회적 낙인, 무엇인가 대가를 노린 ‘꽃뱀’이 아니냐는 비난까지 끼어든다. 공익을 위해 내부 비리를 알린 이들조차 ‘배신자’로 찍히는 마당에, 성폭력 피해자에게는 더한 비난의 화살들이 꽂히는 것이다.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을 주로 변호해온 이은의 변호사는 “가해자와 인사권을 가진 사람들은 ‘그 정도가 성추행이냐, 친한데 그 정도 스킨십도 못하나’라는 생각을 공유한다”며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조직에 해가 되는 사람’으로 낙인찍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이 조직 내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인사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부지기수다. 민주노총과 공익인권법그룹 공감이 2011년 여성노동자 1652명을 대상으로 조사했을 때 직장 내 성희롱 피해를 알렸다가 원치 않은 근무지 이동을 겪었다는 응답이 10.6%였다. ‘자발적 퇴사’(6.7%), ‘해고나 근로계약 갱신 거절’(2.9%)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일들을 지켜보는 피해자들은 ‘조직이 나를 보호해줄 것’이라는 신뢰를 갖지 못하고 피해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다.
남녀고용평등법에는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에게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조치’를 해서는 안된다고 규정돼 있지만 현실에서는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 욕설, 따돌림 같은 직장 내 괴롭힘이 ‘불리한 조치’에 해당하는지조차도 명확하지 않다.
백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는 “성희롱 사건 조사에서 피해자를 구제한 뒤 ‘누구 잡아먹었다는 그 여자 누구냐’는 비난에 시달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그는 “정부가 성폭력 피해자 보호조치를 강화하고 제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16년 남녀고용평등법상 피해자 보호규정을 구체화하라고 고용노동부에 권고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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