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15 남지원 기자 somnia@kyunghyang.com
입춘이 지나고 설 연휴가 찾아오며 긴 겨울도 지나가고 있다. 며칠씩 냉동실 같은 찬 공기로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다가 날씨가 풀릴 만 하면 미세먼지가 공습하는 일이 반복된 겨울이었다. 기상청에 따르면 1월 전국 평균기온은 영하 2도로 평년 수준(영하 1.6도~영하 0.4도)를 밑돌았다. 지난달 24일에는 전국 평균기온이 영하 10.4도를 기록하기까지 했다.
서울이 모스크바보다 춥다든지, 한국인들이 엘사가 얼려버린 <겨울왕국>의 아렌델 주민 같은 처지가 됐다든지, 남극 세종기지가 차라리 더 따뜻하다든지 하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 오갔다. 정말 서울이 제일 추웠을까. 영화 속 꽁꽁 얼어붙은 그 장소들은 올 겨울 얼마나 추웠을까.
<겨울왕국> 엘사가 얼려버린 아렌델
눈과 얼음을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는 <겨울왕국> 속 아렌델 왕국의 공주 엘사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여왕으로 등극했지만, 대관식 날 처음 만난 왕자와 결혼하겠다는 동생과 싸우다 능력을 들키고 산 속으로 도망친다. 엘사는 산 속에 자신만의 얼음성을 짓고, 아름답던 아렌델에는 끝없는 겨울이 찾아온다.
<겨울왕국>속 아렌델 왕국의 스틸컷. 엘사가 얼려버리기 전의 아름다운 모습.
꽁꽁 얼어붙은 아렌델 성.
<겨울왕국>의 배경인 아렌델은 노르웨이를 모티브로 했다. <겨울왕국> 팬들이 만든 백과사전인 프로즌위키에에 따르면 제작진은 피요르드를 낀 항구도시 아렌델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노르웨이의 해안 도시인 베르겐과 발레스트란드를 참조했다고 한다. 두 도시 모두 한국보다 훨씬 북쪽에 있다. 베르겐은 북위 60도, 발레스트란드는 북위 61도에 위치했다. 북위 37도에 위치한 서울보다 한참 높고, 북극권을 가르는 선인 북위 66도와 가깝다.
하지만 북대서양을 흐르는 세계 최대의 난류인 멕시코 만류의 영향으로 노르웨이 해안지역은 위도에 비해 놀랄 만큼 따뜻하다. 지난달 베르겐이 가장 추웠던 날은 기온이 영하 5도까지 떨어졌던 1월6일이었다. 같은 기간 동안 서울이 가장 추웠던 날은 1월26일이었는데 당일 최저기온은 무려 영하 17.8도를 기록했다. 이날 베르겐의 최저기온은 0도, 최고기온은 3도였다.
<남극일기> 탐험대가 찾아가던 도달불능점
“영하 80도의 혹한, 낮과 밤이 6개월씩 계속되는 남극” 송강호와 유지태가 출연한 영화 <남극일기> 시놉시스의 한 대목이다. 한국 탐험팀이 남극의 ‘도달불능점’을 정복하기 위해 남극 탐험에 나섰다가 대원들이 점점 미쳐가는 스릴러 영화다.
남극 대륙의 도달불능점에 소련이 세운 레닌 흉상. 위키피디아
도달불능점(pole of inaccessibility)이란 해안에서 가장 먼 대륙 내의 지점, 또는 땅에서 제일 먼 바다 안의 지점을 뜻한다. 정말 도달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고 가장 가기 어려운 곳이라는 뜻이다. 해안선의 위치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도달불능점의 정확한 위치는 조금씩 달라지지만 일반적으로 1958년, 1957년 구소련 탐사팀이 탐사한 남위 82도06분, 동경 54도58분을 남극 대륙의 도달불능점으로 본다. 아직도 이 자리에는 모스크바 방향을 보고 서 있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흉상이 있다. 이곳은 남극에서도 추운 축에 속한다. 연평균 기온은 영하 52도. 한국의 연평균 기온인 12.5도보다 60도 가량 낮다. 지구상에서 공식적으로 가장 낮은 기온이 기록된 곳은 도달불능점에서 약 1000㎞ 가량 떨어진 보스토크 기지다. 1983년 영하 83.2도를 기록했다.
남극 세종과학기지 전경. 극지연구소 홈페이지
남극의 모든 곳이, 늘 추운 것은 아니다. 남극 세종기지에서 근무하다 최근 한국으로 돌아온 극지연구소 이원영 연구원은 지난달 30일 트위터에 “드디어 한국이 왔다. 남극보다 한국이 훨씬 더 춥다. 진짜로. 남극 보내줘”라는 글을 올렸다. 실제로 1월30일 세종기지의 최고기온은 1도, 최저기온은 영하 1도였지만 한국은 최고기온이 영하 1도, 최저기온이 영하 11.4도였다. 세종기지는 남극 대륙 북쪽 사우스셰틀랜드 제도의 킹조지 섬 해안가에 있다. 위도도 남위 62도로 그리 높지 않다. 더구나 남극은 지금이 여름이다. 겨울이었던 지난해 7월 세종기지의 최저기온은 영하 20도까지 내려갔다.
<러브레터> 속 눈의 도시 오타루
죽은 남자친구의 사라진 옛 주소로 보낸 편지에 답장이 돌아왔다. 묘한 편지를 주고받던 여자는 편지를 보낸 사람이 남자의 중학교 동창이자 동명이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홋카이도 서부의 작은 도시 오타루로 여행을 떠난다. 잘못 전달된 편지 한 장으로 첫사랑의 추억을 되살린 영화 <러브레터>의 배경인 오타루는 일본의 유일한 냉대습윤기후대에 있다. 여름이 짧고 겨울은 길며 겨울철에 온대저기압의 영향으로 눈이 많이 내린다. 10월말~11월초쯤 첫운이 오기 시작해 4월 초까지 눈이 계속된다. 1미터씩 눈이 쌓이는 일도 흔하다. 해안지역이지만 워낙 북쪽에 있어 겨울 기온도 낮은 편이다. 1월24일 오타루의 최저기온은 영하 10도까지 떨어졌다.
<러브레터> 속 가장 유명한 장면은 여주인공이 텅 빈 설원 위에서 “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라고 외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오타루가 아닌 나가노의 한 목장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1998년 동계올림픽이 열리기도 했던 일본 본섬인 혼슈 중앙부에 있는 나가노는 가까운 도쿄나 나고야에 비해 추운 편이다. 지난달 내내 최저기온이 대체로 영하권에 머물렀고, 1월31일에는 기온이 영하 9도까지 떨어졌다.
<샤이닝> 겨울이면 고립되는 오버룩 호텔은 어디?
깊은 산속의 고풍스러운 호텔. 겨울에는 문을 닫고 관리인을 고용해 봄이 올 때까지 호텔을 관리한다. 작가 지망생인 잭은 아내 웬디, 아들 대니와 함께 겨울 동안 글을 쓰기 위해 호텔을 찾는다. 대니는 호텔에서 죽은 소녀, 피바다가 된 엘리베이터 같은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고 잭은 점점 미쳐간다. 스탠리 큐브릭의 공포영화 걸작 <샤이닝>은 겨울에 눈이 내리면 누구도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게 돼버리는 괴기스러운 장소, ‘오버룩 호텔’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 <샤이닝>속 불타는 오버룩 호텔. 원작자 스티븐 킹은 콜로라도 에스티스파크에 있는 스탠리 호텔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이 호텔의 모티브가 된 곳은 미국 서부 콜로라도주의 산골 마을 에스티스파크에 있는 스탠리 호텔이다. <샤이닝>의 원작소설을 쓴 소설가 스티븐 킹은 1974년 이 호텔을 방문해 “유령 이야기를 위해 매우 완벽한 곳”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에스티스파크는 길이만 4800㎞ 달하는 로키산맥 한복판에 있는 작은 마을로, 해발고도가 2000m가 넘을 정도로 높고 매우 춥다. 1월 평균 최저기온은 영하 16도. 1월16일에는 최저기온이 영하 24도까지 떨어졌다.
올해 유달리 심하게 추운 날이 많고 길었던 것은 북극의 이상고온 때문이라고 한다. 한반도 북쪽 상공에 형성된 저기압이 한 자리에 머물면서 회전문이 돌듯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고, 이 바람을 타고 북극의 찬 공기가 한국에 몰아쳤다. 북극 공기가 한반도까지 내려온 것은 우랄산맥 부근에 만들어진 고기압 때문이다. 북극 카라해의 기온이 올라 얼음 면적이 줄면서 인근 우랄산맥에 고기압이 형성됐고, 이 고기압이 한반도 북쪽 상공의 저기압을 이동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남동쪽으로 찬바람을 불어넣었다. 북극 기온이 올라가면서 북극의 찬 공기가 아래 지역으로 흘러내리지 않도록 막아주는 제트기류도 힘을 잃었고 댐이 터지듯 차가운 공기가 중위도까지 몰아쳤다.
올해 겨울에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에도 기록적인 한파가 몰아닥쳤다. 나이아가라 폭포가 꽁꽁 얼어붙고 수십명이 사망했다. 미국 뉴햄프셔주 마운트 워싱턴은 1월6일 기온이 영하 38도, 체감온도는 영하 70도까지 내려갔다. 캐나다 동부 온타리오와 퀘벡주는 영하 50도에 근접했다. 눈보라와 한파로 뉴욕 JFK 등 주요 공항들이 마비되기까지 했다. 북아메리카 한파도 한국 한파와 마찬가지로 북극의 얼음이 녹았기 때문이다. 북극해 얼음이 녹으면서 열과 수증기가 방출되고, 성층권에서 한기를 가둬두고 있는 북극 소용돌이가 약해져 북극 상공의 한기가 중위도 지상까지 그대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투모로우>와 <설국열차> 속 영원한 겨울
지금처럼 북극 얼음이 계속 녹고 지구 평균기온이 올라간다면 어떻게 될까. 2004년 개봉한 미국 영화 <투모로우>는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 해류의 흐름이 바뀌고, 결국 급격한 기후변화가 일어나 북반구가 빙하로 뒤덮이는 미래를 그린다. 미국 정부는 남쪽으로 이동하라는 대피령을 내리고, 피난민들은 미국 남부를 지나 멕시코까지 몰려가고 멕시코에는 미국인들로 가득찬 거대한 난민캠프가 생긴다. 영화처럼 단 몇 주 안에 지구가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급격한 기후변화가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매년 반복되는 북극 한파는 <투모로우> 속 재난과 유사한 측면이 많다.
<투모로우>가 묘사한 빙하기. 뉴욕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영화 속에서는 기온이 급강하하면서 스코틀랜드 상공을 날던 헬리콥터 연료가 얼어 추락하고, 차 안에 있던 사람이 그대로 얼어죽는다. 주인공은 연료가 얼어붙을 정도면 기온이 영하 65도 아래로 내려갔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실외에 있는 모든 것이 얼어붙고, 한기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주인공을 쫓아오면서 주위가 순식간에 얼어붙기도 한다.
봉준호 감독의 2013년 영화 <설국열차>도 빙하기가 닥친 근미래를 그렸다.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 전세계 78개국이 대기권에 살포한 냉각제 CW-7 가스의 영향으로 지구에 빙하기가 찾아오고 모든 생물이 사라진 지 17년이 지난 2031년이 배경이다. 전세계를 일년에 한 바퀴씩 도는 초대형 자급자족 기차만이 얼어붙은 지구 위를 질주한다. 맨 앞칸의 부자들은 꼬리칸의 무임승차자들을 착취하며 살아간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설원 위를 달리는 설국열차.
<설국열차> 속 얼어붙은 지구는 <투모로우>보다도 춥다. 설정상 어떤 생명체도 기차 밖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극한의 추위를 가늠하게 하는 장면이 영화 초반부에 등장한다. 꼬리칸의 한 남자가 기차 관리인에게 신발을 던진 죄로 오른팔을 기차 바깥에 내놓아 냉동시키는 벌을 받는다. 남자의 팔은 단 7분만에 망치로 치면 깨질 정도로 꽁꽁 언다. 원작 만화에 따르면 빙하기가 된 열차 바깥의 기온은 영하 90도라고 한다. 고도가 얼마나 되는지, 낮인지 밤인지에 따라 이보다 낮을 수도 있으니 남극의 웬만한 곳보다도 훨씬 더 추운 셈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영화 속 묘사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북극곰이 살 수 있는 온도인 영하 40도까지 기온이 오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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