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참정권 외치는 10대들
지난 4일 세계여성의날을 앞두고 한국여성대회에 참가한 청소년들이 ‘서프러제트’라는 낯선 단어가 쓰인 손팻말을 들고나왔다. 서프러제트(suffragette)는 20세기 초 영국에서 참정권 운동을 벌인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달라고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던 여성들의 구호가 한 세기도 더 지나 서울에 등장한 것이다.
한국은 선거권을 갖는 연령이 만 19세다. 그러나 의회가 있는 나라의 90%는 18세부터 투표권을 준다. 아르헨티나, 오스트리아, 브라질 등은 16~17세부터 투표를 한다. 국제의회연맹(IPU)의 2016년 보고서에 따르면 18세에도 투표권이 없는 나라는 한국, 바레인, 레바논, 말레이시아, 오만뿐이다.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거연령 만 18세 하향’이 화두로 떠올랐다. 청와대는 26일 선거연령을 낮추는 내용이 담긴 개헌안을 발의했다. 200여개 청소년·교육·인권단체들은 지난해 9월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를 꾸리고 선거연령을 낮출 것을 요구하고 있다.
ㆍ머리 맞대 청소년 정책 세워도 투표권 없어 아무도 관심 안 줘
ㆍ‘선동당했네’ ‘너희가 뭘 아냐’ 선입견 품고 보는 어른들은 얼마나 따져보고 투표하나
ㆍ만 18세부터 선거권 생기면 학생인권법 제정 힘 얻을 것
이들은 “정치인들과 정당들이 국민에게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에게 참정권이 있기 때문”이라며 “이런 권리가 없는 청소년 인권은 유린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국회의 응답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며 지난 22일 여의도에서 삭발을 하고 농성을 시작한 청소년들도 있다. 25일 경향신문사에서 김윤송 청소년농성단 단장(16)과 변지혜양(17), 이은선 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공동대표(18), 정유정 청소년인권행동 단체 아수나로 활동가(16)를 만났다.
- 왜 선거연령을 낮춰야 한다고 보나.
이은선 = 울산에서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요구하는 운동을 했다. 지역 청소년 참정기구에서 1년 동안 조례 내용을 준비했는데, 관심을 갖는 정치인은 아무도 없었다. 교육감은 비리로 구속되고 시의원은 한 명 빼고 모두 자유한국당 소속이어서 조례를 발의할 만한 의원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주민발의였는데, 만 19세 이상이어야 한다는 연령 제한이 있었다. 1년 동안 준비한 게 그냥 그렇게 끝났다. 농락당하는 느낌이었다. 참정권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우리가 당초 요구하고 싶었던 것은 ‘16세 투표권’이지만 한발 물러서 세계의 여러 나라들처럼 18세에라도 투표권을 달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변지혜 = 지난해 경기도 청소년 정책을 만드는 기구에 참여했다. 우리끼리 회의하고 기자회견 열면서 뭔가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아무것도 된 게 없었다. 정치인들은 ‘표’가 돼야 이야기를 들어준다. 투표권을 가지면 조금이라도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까. 나이 1살 차이로 누군가는 투표를 하고, 누군가는 할 수 없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은선 = 내가 다닌 학교는 청소년 참여기구에서 활동하려면 학교장 허락을 받아야 했다. 허락 없이 하면 징계한다는 교칙이 있다.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활동을 하면 퇴학까지 시킬 수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에도 울산에서 집회를 주동했다고 징계받은 학생이 있었다.
- 하지만 청소년은 아직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온전히 행사하기엔 이르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정유정 = 성숙함의 정의는 ‘몸과 마음이 다 자라서 어른스러워지다’라고 한다. 어른스러움이 성숙한 거라면 청소년은 절대 어른스러울 수 없다. 청소년에게 참정권을 줘서는 안된다는 순환의 굴레인 셈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여성, 흑인, 노동자에게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참정권을 주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애 같다, 어른 같다를 따지지 않고 청소년도 시민이기 때문에 참정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은선 = 세금을 내야 참정권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도 들었다. 그러나 납세의 의무와 참정권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렇게 따지면 돈 많은 청소년은 투표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청소년이 투표하려면 후보 3명 이름과 공약을 외우게 시켜야 한다고 하더라. 그런데 투표하는 어른 중에도 뽑지 않을 사람 공약까지 외우고 가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않나.
정유정 = 청소년 참정권 기사에 달린 댓글을 찾아봤다. “전교조한테 선동당했다” “어른들한테 선동당한 애들”이라는 얘기가 많았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며 서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보면 어른들도 ‘선동을 당하는’ 것인데 왜 청소년들에게만 이런 우려를 하는지 모르겠다.
김윤송 = “요즘 것들 말 안 들어”라고 청소년을 비난하면서 왜 정치·사회에선 어른들 말을 따를 거라고,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일관성이 없다.
- 집이나 학교, 사회에서 ‘청소년’은 어떤 의미일까.
이은선 = 입시공부만 하는 기계. 아무것도 모르는 애. 교복 입고 은행 갔는데 주민등록증 있는지 묻지도 않고 부모님 모셔오라 하더라. 동사무소에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으러 갔다가 “그 나이에 왜 떼느냐”는 소리도 들었다.
변지혜 = 양면성이 있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청소년이 이런 것도 하네. 되게 똑똑하다”고 하면서 “네가 뭘 안다고 그래”라고도 한다. 어른들과 생각이 다를 때에만 아이들도 상황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청소년 참정권을 얘기하면 “너희가 뭘 알아”라고 하지만 어른들 중에도 아무것도 모르고 투표하는 사람도 있고, 가기 귀찮아서 안 하는 사람도 있고, 포스터조차 안 보는 사람도 있다. 청소년들도 마찬가지일 텐데 왜 청소년들에게만 따지는 걸까.
- 여성 청소년으로 살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김윤송 = 삭발하고 나니 사람들이 언뜻 보면 내가 여자인 줄 모른다. 예전보다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게 조심스러워졌다. 삭발은 50대 남성 노동자들의 투쟁 방식이라는 느낌이 있다. 삭발 같은 정치적 표현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다. 그걸 깨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정유정 = 우리 의지로 삭발을 한 건데도 선동당했다고 얘기하는 걸 보면 우리 얘기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싶다. 왜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을까. 청소년 참정권이 빨리 실현되려면 고정관념을 깨고 시선을 넓혀야 한다.
변지혜 = 여자애들이 화장을 진하게 하면 “술집여자”라 하고, 치마를 짧게 입으면 “똥꼬 보이겠다”고 하는 교사들이 있다. 남학생들도 모멸감을 주는 말이나 행동을 할 때가 많다. 활발하고 남학생들 휘어잡는 여학생에게는 “조폭마누라”라고 하면서, 그 반대 경우엔 “남학생이 여학생을 좋아하나 보다”라고 여긴다.
이은선 = 삭발식 때에도 “여자인데 삭발해도 괜찮겠어”라고 묻더라. 여성은 꼭 머리가 길어야 하나. 사회에서 여성성을 자꾸 강조하고 만들려고 한다. 학교에서 축구동아리를 했는데, 남자 선생님이 반바지 입은 나에게 “왜 여자가 축구를 하느냐”고 물었다. 한번은 집에 가는데 선생님이 볼을 꼬집으면서 “너는 내가 소개해주는 남자랑 결혼해라. 내가 많이 아끼니까”라고 했다. 학생부장 선생님은 여학생들 ‘치마 상태’를 검사하면서 볼펜으로 찔렀다. 그런 문제들을 국가인권위원회와 국민신문고에 올렸더니 교육청에서 내가 올린 내용을 그대로 학교에 보냈다. 학교 안에도 젠더 간 위계질서, 교사와 학생 간 차별적인 권력이 있기 때문에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김윤송 = 이번 미투 운동으로 폭로된 사건들은 ‘권력형 성폭력’이다. 그런데 성인과 미성년자 사이에서는 힘의 차이가 더 커진다. 학교 안에서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위치 때문에 권력 차이가 더 벌어진다. 청소년 참정권이 청소년 인권을 보장하는 첫걸음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 사회활동을 하는 것에 대한 주변의 시선은 어떤가.
이은선 = 교장 선생님이 학생인권조례 운동을 하는 나를 따로 불러서 “너는 정치인 총알받이”라고 말했다. 한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나를 거론하면서 “지금 그걸 할 때가 아니다”라고 했다.
정유정 = 지금 하는 활동은 미래를 위한 경험이 아니라 ‘지금을 위한 활동’이다. 그런데 청소년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경험’을 하고 있다고 하는 이들이 많다. 나도 당당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말이다.
- 투표권을 갖게 된다면 어떤 목소리를 내고 싶나.
정유정 = 학생인권법 제정이 가장 우선이다. 또 지금은 근로계약서를 쓸 수 있는 나이가 만 15세로 정해져 있다. 그 나이를 폐지하고 싶다.
김윤송 = 청소년 참정권 문제는 선거연령을 낮추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성들도 참정권이 있지만 남성들과 사회적 위치가 같지 않은 것처럼.
이은선 = 스스로 의지만 있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정책을 제안하고 싶다. 학생인권법 제정 운동도 계속 이어갈 거다.
변지혜 = 청소년이 투표할 수 있게 된다고 해서 사회가 크게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청소년 참정권은 당연한 권리를 찾는다는 의미일 뿐이다. 투표권이 생기면 페미니즘 교육을 도입하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싶다. 청와대 청원까지 올라온 학교 내 페미니즘 교육은 정부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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