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 공무원들은 단지 ‘청와대 지시’라는 이유로 위법·부당 행위를 기획하고 실천했다. 적극적 저항이나 거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공무원으로서 공익을 추구해야할 책무를 잊어버린 행위다.”
교육부 역사교과서국정화진상조사위원회 고석규 위원장은 28일 7개월에 걸친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진상조사위는 법을 무시하고 국정화를 밀어붙인 박근혜 청와대와 교육부의 전·현직 고위공직자 25명에 대해 직권남용·횡령·배임 등의 혐의로 수사의뢰를 해 달라고 이날 교육부에 요청했다. 또 교육부 실무집행자 10여명에 대해서도 사실상 징계에 의미하는 ‘신분 상 조치’를 요구했다. 조사위는 이들의 행위에서 “정책 추진의 정당성과 민주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추진됐던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문재인 대통령 취임 직후인 지난해 5월 폐기됐고, 진행과정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 같은해 9월 진상조사위가 출범했다. 진상조사위 조사결과 청와대가 주도한 비밀 태스크포스(TF)팀 운영, 여론조작, 국정화 반대학자 ‘블랙리스트’ 등 숱하게 제기돼 왔던 의혹이 사실로 확인됐다.
■ 총대 메고 나섰던 교육부
국정 역사교과서가 추진된 과정에서 진상조사위가 파악한 위법행위는 여론조작, 비밀TF 운영, 홍보비 부당처리, 편찬·집필 과정의 위법, 반대학자 배제 등이다. 여론조작은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가 ‘차떼기’ 사건이다. 교육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행정예고한 후 절차에 따라 찬반 의견을 수렴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동일한 주소의 찬성 의견서 1613장, 동일인의 찬성 의견서 100여장이 접수됐다. 의견서들은 트럭에 실려 교육부에 전달됐지만 허위의견서가 수두룩했고, 심지어 인적사항란에 ‘이완용’ ‘조선총독부’ 등이 적힌 의견서도 있었다. 진상조사위는 허위 의견서 ‘차떼기’에 대해서는 지난해 수사의뢰를 했고 현재 검찰이 관련 업체 등을 수사 중이다. 진상조사위는 교육부 직원들로부터 “밤에 찬성 의견서 상자가 (세종 청사에) 도착할 것이므로 의견서를 계수할 수 있도록 직원들을 야간 대기시키라는 김모 당시 교육부 학교정책실장의 지시가 있었다”는 증언을 확보해 검찰에 넘긴 상태다.
교육부는 청와대 지시를 받아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지지하는 교수 모임’의 지지 선언이 나오도록 관여하거나, 국정화 지지 기고문을 작성한 뒤 민간인 기고자를 섭외해 제공하고, 홍보리플릿을 작성해 시민단체의 이름으로 배포했다. 온라인 동향까지 체크해 경찰청과 문화체육관광부에 전달했다. ‘지시가 내려와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 총대를 메고 나섰던 셈이다.
교육부는 청와대 이병기 전 비서실장과 김상률 전 교육문화수석의 지시로 국정화를 몰래 추진하기 위한 비밀TF를 구성했다. 비밀TF는 행정기관 조직 관련 법령을 위반한 것이었고 근무인원 배치에 대해선 기관장 결재조차 없었다. 이 TF는 국정화 홍보예산 24억8000만원 가운데 절반가량을 ‘방송제작 협찬’ 형태로 사용했다. 광고가 아닌 협찬은 공개입찰이나 법령에 따른 언론진흥재단 위탁을 피할 수 있다. 방송제작 협찬은 SBS에 돌아갔는데 당시 여당 쪽 인사와 관련이 있는 광고대행사가 이 과정에서 1억7000여만원을 몰래 챙기기도 했다. 당시 계약은 비밀TF를 대신해 교육부 역사교육지원팀이 체결했지만 실무자들은 이런 돈이 나간 사실조차 몰랐다. 교육부는 절차상 하도록 돼 있는 용역계약 감사를 하지도 않았다.
■“교문수석실 통해 지시한 박 전 대통령도 수사의뢰 대상”
청와대는 국정화 역사교과서의 ‘편찬기준’에 대해 수정의견을 냈고 교육부는 이를 대부분 그대로 따랐다. 편찬기준은 교과서 제작 가이드라인을 의미한다. 청와대의 요구는 ‘깨알’ 같았다. 이를테면 ‘새마을 운동을 서술할 때 그 성과와 한계를 서술한다’는 대목에서 ‘한계’를 빼고 ‘의의’를 넣어달라고 했다. 수정된 편찬기준에서 이 대목은 ‘새마을 운동이 농촌 근대화의 일환으로 추진됐고 최근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음에 유의한다’로 바뀌었다. 청와대는 또 경제발전 관련 내용에선 ‘사회양극화’와 ‘환경오염’을 삭제하고 남북의 평화모색 활동에 대한 내용도 없애달라고 요구했다. 청와대의 수정의견 21건 가운데 18건이 최종 편찬기준에 반영됐다.
편찬심의위원 16명 중 13명도 청와대가 낙점했다. ‘역사교과서 개발 지원 업무’만을 맡게 돼 있는 국사편찬위원회가 국정 역사교과서 편찬기관으로 지정된 것도 직제규정 위반이었다. 국사편찬위는 집필진에게 과도한 집필료를 줬는데, 이는 직권남용으로 볼 수 있는 행위였다. 교육부와 국사편찬위는 집필진과 협의없이 국정교과서 내용을 수정하기도 했다. 국정화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학술연구지원에서 배제했다.
진상조사위는 이런 위법행위를 저지른 박근혜 청와대와 교육부 전·현직 고위공직자 25명을 수사의뢰 해 달라고 교육부에 요청했다. 수사의뢰 대상은 박근혜 전 대통령,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이병기 전 대통령 비서실장, 서남수·황우여 전 교육부 장관, 김관복·이기봉 전 청와대 교육비서관,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김한글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실 행정관, 강지연 전 황우여 장관 정책보좌관, 김정배 전 국사편찬위원장, 교육부의 김동원 전 학교정책실장, 박성민 전 역사교육정상화추진단 부단장, 오석환 전 국정화 비밀TF 단장 등이다. 진상조사위는 이들의 행위에 직권남용, 횡령·배임, 업무상 횡령·배임 의혹이 짙다고 판단했다.
진상조사위는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실에 대해서는 조사권이 없어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연결고리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교문수석실을 통한 지시가 박 전 대통령에게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므로 수사의뢰 대상에 포함했다”고 설명했다.
진상조사위는 교육부 실무자 10여명에 대해서도 국가공무원법상의 성실의무·공정의무·품위유지의무를 위반했다고 보고 ‘신분 상 조치’ 즉 사실상의 징계를 내릴 것을 요구했으나 이들의 실명은 밝히지 않았다.
김상곤 “역사교과서 국정화 관련 교육부 공무원 수사의뢰 요청, 신중히 검토”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가 박근혜 청와대와 교육부 고위공직자 25명의 수사의뢰 요청에 대해 신중히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부총리는 29일 오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공무원들이 (과거 정부의 지시대로) 일했다가 수사의뢰를 당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자유한국당 윤상직 의원의 질문을 받고 “25명과 관련, 교육부 직원까지 포함돼 있는데 그 부분은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본다”고 답했다. 이어 “(진상조사위에서) 저희에게 그렇게 제안을 했는데, 감사원 감사도 청구돼 있으므로 그런 과정들을 지켜보면서 (판단하겠다)”라고 덧붙였다.
앞서 28일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는 직권남용·횡령·배임 등의 혐의가 짙은 청와대·교육부의 전·현직 고위공무원 25명을 수사의뢰할 것을 교육부에 요청했다. 또 교육부의 실무집행자 10여명에 대해서도 사실상 징계를 의미하는 ‘신분 상 조치’를 요구했다.
진상조사위는 교육부 고위 공무원이 수사의뢰 요청 대상에 포함된 데 대해 “교육부는 초기부터 단지 ‘청와대 지시’, ‘장·차관의 지시’라는 이유로 많은 위법행위를 기획하고 실천했다”면서 “공무원이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공익을 추구해야 할 책무를 잊어버릴 때,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서 정체성을 견지하면서 성실의 의무를 다하지 않을 때, 우리 사회의 밝은 미래는 요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위해 위법행위를 한 교육부 공직자들에게서) 정책 추진의 정당성과 민주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고 덧붙였다.
진상조사 결과에 따르면, 교육부는 이병기 전 비서실장과 김상률 전 교육문화수석의 지시로 행정기관 법령에 어긋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비밀TF’를 구성했다.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지지하는 교수 모임’의 지지 선언이 나오도록 관여하거나, 국정화 지지 기고문을 작성한 뒤 민간인 기고자를 섭외해 제공하고, 홍보리플릿을 작성해 시민단체의 이름으로 배포한 사실도 확인됐다.
교육부는 또 ‘국정화 지지’ 답변이 나오도록 국민 대상의 여론조사 문항을 조작하고 온라인 동향도 체크해 경찰청과 문화체육관광부에 전달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한 학자들은 학술연구 지원을 받지 못하게 하고 지지하는 학자에게 지원을 몰아줬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행정예고 이후 수만장의 허위찬성의견서가 접수된 이른바 ‘차떼기’ 사건에도 교육부 고위 공무원이 깊숙하게 관여한 정황이 드러났다. 허위찬성의견서 사건은 현재 검찰이 수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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