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노동자 김현민씨(가명·42)는 매일 오전 7시쯤 배송할 물건을 실으러 터미널로 출근한다. 곧바로 집집마다 물건을 배달할 것 같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다. 이른 오전 터미널에서는 화물차에서 물건을 내리는 이른바 ‘까대기’ 작업이 시작된다. 전국의 택배 물량은 대전, 용인, 옥천 등의 ‘허브 터미널’에 모였다가 전국 각지의 ‘서브 터미널’로 옮겨진다. 김씨를 비롯한 배송 기사들은 이 서브 터미널에서 자기 구역에 배송할 것들을 챙겨 1t 트럭에 싣고 나간다.
컨베이어벨트가 돌고 배송물품이 와르르 쏟아지면 기사들은 상자를 하나하나 확인해 자기 구역 물건을 찾는다. 김씨는 서울 시내 5개 동을 맡아 하루 평균 200~300개를 배달하는데, 물건을 다 찾아 차에 싣고 나면 정오가 지난다. 본격적인 배송은 이르면 1시, 늦으면 2시에야 시작된다. 물건을 다 전하고 나면 오후 8시가 넘는다. 늘 시간에 쫓기다 보니 밥은 오전 9시쯤 터미널 근처 분식점에서 15분 동안 후루룩 먹는 게 전부다.
김씨가 하루에 일하는 시간은 짧게 잡아도 12시간을 훌쩍 넘는다. 근로기준법이 개정돼 주당 최장 노동시간이 52시간으로 바뀌었지만, 택배기사는 ‘특수고용노동자’로 분류돼 있기 때문에 노동시간에 제한이 없다. 김씨는 CJ대한통운이 도급을 준 위탁대리점과 계약을 맺고 배송 건당 수수료만 받을 뿐, 노동시간이 늘어난다고 임금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배송물품을 분류하는 오전의 업무는 무급 노동인 셈이다.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은 29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택배 노동자가 장시간 노동으로 고통받는 것은 원청인 CJ대한통운이 분류작업을 택배 노동자에게 떠넘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CJ대한통운은 배달 건당 수수료에 분류 작업에 대한 대가도 포함돼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노조는 택배 물량이 늘어나고 분류 작업이 점점 길어지고 있는데도 CJ대한통운이 택배 노동자만 쥐어짜고 있다고 반박한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허브 터미널 운영시간을 줄이거나 하차 인원을 줄이니, 결국 이 부담이 고스란히 택배 노동자에게 전가된다는 얘기다.
실제로 한국교통연구원이 발표한 화물운송시장 동향을 보면, 택배 노동자가 평균적으로 집배송 외의 일을 하는 시간은 2009년 2.6시간에서 2017년 4.2시간으로 늘었다. 지난해 택배 노동자의 평균 집배송 시간인 8시간의 절반에 이른다. 노조는 CJ대한통운의 경우 분류작업 시간이 이보다 훨씬 길다고 주장한다. 2016년 이 회사 일을 하는 택배노동자 307명의 근무실태를 조사했더니 평균 6시간 이상 분류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수적인 일인 분류작업을 본래 업무 만큼이나 오래 하고 있는 것이다. 노조는 “택배 기사들은 노동시간 보호를 받지 못하는 처지 때문에 ‘공짜노동’을 강요당하고 있다”며 “원청인 CJ대한통운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택배연대노조는 지난해 11월 설립신고필증을 발급받았다. 자영업자 신분인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3권을 문재인 정부가 최초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컸다. 노조는 CJ대한통운에 교섭을 요구했지만 사측은 응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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