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작은 회사에서 일하던 중에 아이가 생긴 것을 알았다. 동갑내기 남자친구는 “키울 자신이 없다”고 했다. 부모와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고, 아이를 포기한 남자친구와도 헤어졌다. 2년 전 종교기관이 운영하는 미혼모 생활시설에서 아이를 낳은 ㄱ씨(24) 이야기다. ㄱ씨는 그나마 운이 좋았다. 출산을 하자마자 밤낮없이 공부해 자격증을 땄고 새 일자리도 찾았다. 하지만 월급은 적고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학생인 ‘아이 아빠’와는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는다. 나중에 아이 아빠에게 소득이 생기면 양육비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들었지만, 그 복잡한 소송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대부분의 미혼모들은 ㄱ씨와 비슷하게 산다.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우며, 아이 아빠로부터 양육비를 받는 경우는 드물다. 2015년 여성가족부 실태조사에서 한부모가족의 77.5%는 양육비를 지급받을 법적인 권리, 즉 ‘양육비 채권’을 갖지 못한 상황인 것으로 나타났다. 소송을 내 양육비를 지급받을 여력이 없는 미혼모·미혼부에게 정부가 먼저 양육비를 주고 나중에 비양육 부모에게서 환수하는 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일명 ‘히트 앤드 런 방지법’이라고 불리는 양육비 대지급제를 도입하라는 청와대 청원에는 지난달 말까지 21만명 넘는 시민들이 동참했다. 서명 인원이 20만명을 넘어 청와대가 조만간 공식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
제도를 고치려는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여가부는 최근 양육비 대지급제의 실효성 등을 검토하는 연구용역에 착수해 연말쯤 결과를 내놓을 계획이다. 여가부는 아이를 키우지 않으면서 돈도 주지 않는 비양육 부모의 소득과 재산을 본인 동의 없이도 조회할 수 있도록 법률 개정 절차도 밟고 있다.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줄이고 복지를 늘리는 것과 맞물려, 아이에 대한 책임을 응당 져야 할 ‘반쪽 부모’에게 그 책임을 물려야 한다는 쪽으로 제도와 여론이 만들어지고 있는 모양새다. 육아에서 남성의 책임이 강조되는 사회적 분위기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양육비 대지급제 얘기는 오래전부터 나왔다. 정부도 2000년대 초반 이 제도를 검토했고, 국회에서도 17대 때부터 꾸준히 관련 법안이 발의됐으나 번번이 폐기됐다. 양육비는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 줘야 하기 때문에 재정 부담이 크고, 비양육 부모에게서 돈을 받아내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5년 여가부 산하 한국건강가정진흥원에 양육비 협의를 주선하고 소송과 추심을 돕는 양육비이행관리원이 만들어졌다. 지난 3년간 이혼·미혼 한부모들이 이행관리원을 통해 275억원을 받아냈다.
대지급제가 생기면 미혼모 가구들의 체감 혜택은 크겠지만, 제도가 도입되기까지 예산 문제가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국회에서 번번이 도입이 무산된 것도 예산 때문이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법적으로 혼인하지 않은 채 미성년 자녀를 키우는 엄마는 2만4000명, 아빠는 1만1000명이었다. 이들이 키우는 자녀 5만2000명에게 양육비를 월 20만원씩 지급한다고 단순 계산하면 1년에 1248억원이 들어간다. 비양육 부모에게 구상권을 행사하더라도 얼마나 돌려받을지는 미지수다.
전문가들은 대지급제를 장기과제로 놓고 일단 양육비 ‘이행 강제성’을 끌어올리는 방안부터 도입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행관리원은 소송을 돕는 일만 할 수 있을 뿐 돈을 받아낼 강제력은 없다. 그래서 재판에 이기고도 양육비를 받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돈을 지급받은 ‘이행률’은 지난해 32%에 불과하다. 10명 중 7명은 재판에서 이기고도 양육비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행관리원 관계자는 “법원에서 급여·예금 압류명령을 받아내도 양육비를 내야 할 사람이 압류 전에 돈을 미리 빼내거나 직장을 옮겨버리는 경우가 많다”며 “근무지를 확인하고 압류를 하기까지 2~4주가 걸리는데 압류 절차를 단순화해 이 기간만 줄여도 도움이 많이 된다”고 말했다. 건강보험 중지, 운전면허 갱신 거절, 출국금지 등 국가가 쓸 수 있는 강제적인 수단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특히 미혼모는 양육비를 청구하기가 훨씬 복잡하다. 친부를 찾아내 법원에서 아이와 생부가 친자관계임을 확인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미혼모가 친부의 주민등록번호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과거 전화번호나 주소지로 신원조회를 할 수도 없다. 친부가 아이를 자식으로 인지하는 순간 아빠의 친권과 양육권이 자동으로 살아난다는 것도 미혼모들이 소송을 꺼리는 이유 중 하나다. 최형숙 미혼모협회 인트리 대표는 “친부가 합의해주지 않으면 아이의 성이 친부의 성으로 바뀌고, 친권과 양육권을 법원에서 다시 지정받아야 하기 때문에 아이의 혼란을 우려한 미혼모들이 양육비를 포기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3년간 이행관리원에 들어온 양육비 지급신청 중 미혼모·미혼부가 신청한 사건은 5.6%에 그쳤다.
미혼모의 홀로서기가 가능할 정도의 사회적 안전망도 여전히 부족하다. 법적으로는 미혼모도 결혼한 여성과 똑같이 산전 진찰이나 산전·산후휴가, 육아휴직을 받을 수 있지만 실제로 누리기는 힘들다. 아이를 키우면서 돈도 벌어야 하는데 직장을 유지하기조차 쉽지 않아 대다수가 생활고에 시달린다. 2015년 한국여성재단 조사에서 직업이 있다고 응답한 미혼모는 51%에 그쳤다. 그나마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나 시간제 근무자였고 월소득이 100만원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84%나 됐다. 정부는 월 156만원 이하를 버는 한부모가족에게 양육비를 지원하지만 만 12세 미만 자녀 1인당 월 13만원, 부모가 25세 미만인 경우에도 18만원에 불과하다.
■ 미국, 부양의무자 급여에서 양육비 강제공제
“남자가 자신의 아이를 낳아준 여자와 이혼하려 하거나 여자가 아이들의 아버지와 이혼하려 할 경우 남자는 여자가 가져온 지참금을 돌려주고 토지와 과수원, 집의 사용권을 줘 여자가 아이들을 키울 수 있게 해야 한다.” 3700년 전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 적힌 ‘양육비 지급 의무’ 조항이다. 인류 역사 초기부터 양육비를 내지 않는 아버지가 있었고, 이를 제재할 수단이 필요했다는 뜻이다.
‘양육비’라는 개념은 20세기 이후 이혼이 보편화되면서 생겨났다. 이전까지는 한쪽 당사자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만 이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양육비 부담에는 징벌적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귀책사유 없는 이혼은 이제 평범한 일이 됐으며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다 헤어지는 커플, 혼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도 늘어났다. 이들의 복지가 필요해지면서 지금은 여러 국가가 양육비 강제집행 제도를 갖추고 있다.
독일은 1979년 양육비선급법을 제정해, 12세 미만의 자녀와 함께 살지 않는 부양의무자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아이들이 정부로부터 기본적 생계비를 지원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 대신 정부가 부양의무자의 소득과 재산을 조회해 지급한 생계비를 회수해간다. 법원이 발부한 양육비 ‘집행증서(titel)’는 별도의 경고 없이도 ‘집행관’이 즉시 집행할 수 있다. 영국은 2000년 아동지원·연금·사회보장법을 만들면서 양육 의무가 있는 비양육자에 대한 평가체계를 단순화했고 2008년에는 ‘자녀양육비 이행확보위원회’를 만들어 양육비를 거둬들이고 있다.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이스라엘, 폴란드, 오스트리아에도 비슷한 제도가 있다.
양육비를 받아내기 위해 여권 발급을 불허하거나 운전면허를 취소하고 관허사업의 면허를 제한하는 등 강력한 행정수단을 활용하는 나라도 있다. 미국은 1984년 제정된 자녀양육비이행법에 따라 부양의무자의 급여에서 양육비를 강제공제한다. 양육비 채무자가 돌려받아야 할 세금에서 양육비를 먼저 떼어내고 돌려주는 ‘연방 세금환급 차감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매년 20억달러 이상을 추심한다. 뉴질랜드에서는 국세청이 양육비 이행지원 업무를 직접 맡고 있어 소득이나 재산을 파악하기 쉽다. 양육비를 내지 않으면 엄청난 체납 연체료가 붙는다. 호주에선 양육비 이행 담당관이 채무자에게 출국금지 조치까지 내릴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비양육 부모가 법원에서 명령한 양육비를 내지 않으면 재산을 압류당하는 것은 물론 형사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이혼한 한부모가 아닌 미혼 한부모가 양육비를 받아내려면 법적으로 혼인을 했느냐에 상관없이 보호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가족을 혼인과 관계없이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공동체로 규정하고 있으며, ‘독일기본법’으로 모든 가족을 헌법에 따른 보호 범위에 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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