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미랑 기자 입력 2018.04.04. 16:12 수정 2018.04.04. 21:02
“처음에는 아이들한테 ‘싫어요’ ‘안돼요’ 외치라고 했어요. 그런데 아이들은 못하겠다고 해요. 왜 못 질러? ‘무서워요.’ 이런 답이 나와요. 지금은 성폭력 피해자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곳에 가면 이 말부터 합니다.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그리고 ‘죽지 마세요’.”
손경이씨(49)는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 위촉한 통합폭력예방 전문강사다. 청소년 대상 성교육에서 출발해 직장인, 공무원, 성범죄자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로 강의한 지 올해로 17년째다. 지난달 30일 서울 노원구 광운대에서 그를 만났다. 다른 이들에게 성폭력 등에 어떻게 대응할지, 성폭력이 무엇이며 어떻게 봐야 하는지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의 삶은 바로 그런 기억들로 이뤄져 있었다. 스스로의 인생에서 경험한 것들을 상처로만 남겨두지 않고 에너지로 전화시킨 셈이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 위촉한 통합폭력예방 전문강사 손경이씨가 지난달 30일 서울 노원구 광운대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는 청소년과 직장인 등 다양한 이들을 대상으로 17년째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해왔다. 최미랑 기자
ㆍ‘아들 성교육법’ 펴낸 성폭력 예방 강사 손경이씨
손씨는 여상을 나와 대기업에 취직했다. 부모와 두 동생, 한 집안 생계를 책임졌다. 대학교 채용설명회에 갔다가 “몇 학번이세요”라는 질문을 받고 집에 가서 펑펑 울었다고 했다. 야간대학에 등록해 공부하다가 남편을 만났다. 하지만 ‘결혼한 여자들은 나가야 하는’ 분위기 속에서 퇴사를 했고, 아들을 낳았다. 당시엔 “시어머니에게 구박은 안 받겠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가부장적 의식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던 거예요.”
미투 운동이 일어난 뒤 한 여성은 소셜미디어에 이런 글을 올렸다. 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들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게 아니라, 페미니즘을 공부한 뒤에야 자신이 겪어온 것들이 성폭력임을 깨닫게 되는 거라고. 손씨도 “성폭력에 대해 공부하면서 키운 ‘젠더의식’이 나를 살렸다”고 말한다. 아들을 키우면서 청소년 상담을 공부하게 됐고,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스스로를 재발견했다. 출발은 ‘부모교육’이었다. 아들이 여섯살 때쯤 거짓말하는 걸 보고 몹시 화를 냈다가 ‘아차’ 싶어서 구청에서 무료로 해주는 부모교육을 들었다. 그걸 바탕으로 아이와 대화가 통하게 되니 재미가 있었고, 성교육과 상담을 공부했다.
그런데 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갈 즈음 남편의 폭력이 심해졌다. ‘아들도 있는데 그냥 같이 살아야겠지.’ 어느 날 꿈을 꿨다. 밑 빠진 독에 끝도 없이 물을 붓고 있었다. ‘그만하자.’ 이혼을 결심하고 가정폭력을 신고했지만 경찰은 부부싸움이라며 손씨에게도 폭행죄를 적용했다. ‘그냥 합의하시죠’ ‘그 정도는 다 때려요’ 같은 말이 돌아왔다.
ㆍ‘아들과 성 관련 수다’ 유튜브 60만 조회…51세기 모자로 유명
이혼을 하고 나니 생계를 위한 전쟁이 시작됐다. 아들 잘 키우려고 시작한 공부가 본업이 됐다.
그는 스스로를 “현장형 인간”이라고 표현한다. 공부를 하고 상담과 강연을 하면서 그 자신이 커나갔기 때문이다. 손씨는 20대 초반 며칠간 감금된 채 성폭력을 당하다 도망쳐나온 일이 있었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범인은 잡지 못했다. 20여년이 지났는데도 매년 그맘때면 우울해진다. 해마다 그 시기가 오면 엄마의 마음을 아는 아들과 여행하며 끝도 없이 수다를 떤다고 했다.
올해 23살인 아들과는 성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얘기를 나눈다. 자위, 연애, 성폭력까지. 지난해 온라인 영상매체 닷페이스가 손씨와 아들을 인터뷰해 내보낸 ‘엄마와 나’ 시리즈는 유튜브 등에서 283만번 가까이 조회됐다. ‘51세기형 엄마와 아들’이란 댓글이 달렸다. 얼마 전에는 <당황하지 않고 웃으면서 아들 성교육 하는 법>이라는 책도 냈다. 발기, 2차성징, 자위 같은 소재를 아이에게 설명하는 ‘노하우’를 담았다. 기본은 ‘존중’과 ‘동의’다. “엄마가 안아줘도 돼?” “뽀뽀해도 돼?” 어린 아들과 스킨십 할 때도 습관처럼 동의를 구했다고 했다. 내 몸을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남의 몸도 소중하게 다루게 된다고 믿어서다.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들 중 몇몇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이민을 가거나, 성형수술을 받고 종적을 감췄다. “곁에 서주는 사람이 없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라고 그는 말한다. 특히 성폭력에 대해 ‘씻을 수 없는 상처’ ‘되돌릴 수 없는 일’ 같은 표현은 쓰지 말아달라고 손씨는 당부한다. 피해자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가해자들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외계인이 아니라 분명 어느 부모의 아들입니다.” 세상이 바뀌려면 남성이 변해야 하고, 어릴 때부터 젠더 감수성을 키워줘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ㆍ배우지 않으면 나도 가해자 될 수도…‘외상후 성장’에도 관심
손씨는 강연을 할 때 “피해자 ‘예방’이 아니라 가해자를 예방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폭력에 대해 배우지 않으면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니 “세상이 좋아질수록, 인권이 올라갈수록 공부하고 또 공부해서 예민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강연을 듣고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남성들이 욕을 먹는다’며 항의한 사람도 있었다.
공공기관이나 기업의 성폭력 징계위원회에 외부위원으로 참석해보면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 가해자들도 있다. “잘 알고 제대로 처벌받게 하기 위해” 그는 최근 범죄학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요새 그를 사로잡은 건 ‘외상후 성장(PTG)’이라는 개념이다. 삶을 흔드는 위기사건과 싸우면서 긍정적인 심리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저 스스로 생각해도 참 많은 일을 겪었거든요. 지금은 이렇게 강의도 하고 인터뷰도 하면서 잘 살고 있지만요. 아마 억울함, 부당함을 못 참고 터뜨려버린 덕분 아닐까요.” 성장의 ‘동력’을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최미랑 기자 r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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