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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학년도 대입 혼선]원칙 깬 교육부, 갑자기 ‘정시 확대’

ㆍ수시 수능 최저기준 폐지 권고에 ‘정시 30%’ 목표 정한 듯
ㆍ대부분 대학들 전형 계획 미룬 채 교육당국 눈치만 살펴
ㆍ학부모들 ‘학종’ 반발 거세지자…유권자 의식해 ‘헛발질’

[2020학년도 대입 혼선]원칙 깬 교육부, 갑자기 ‘정시 확대’…교육감 선거 의식했나

“교육부가 사실상 ‘정시 비중 30%’를 목표치로 정했다.” 

교육부가 학생부종합전형(학종) 등 수시 선발을 확대해 고교 공교육이 제자리를 잡도록 하겠다던 수년간의 방침을 갑자기 뒤바꾸겠다는 듯 ‘정시 확대’라는 새로운 입시 틀을 거론하면서 교육현장의 혼선이 극에 달하고 있다. 연세대는 2020학년도 수시 모집에서 교육부 방침대로 수능 최저학력 기준을 폐지하고 정시 모집을 소폭 확대하겠다고 발빠르게 발표했지만, 대부분 대학들은 지난달 30일까지로 예정했던 전형계획 확정을 미룬 채 눈치를 보고 있다. 서울대, 고려대 등은 현재로선 기존 틀을 유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대응이 제각각인 것은 당국의 메시지가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수능의 영향력을 줄이고 학종을 확대한다는 것이 김상곤 장관(사진)과 교육부의 기본 틀이었는데 6월 교육감 선거를 앞두고 갑자기 정시 비율을 늘리라는 엇갈린 신호를 내놓은 탓이다.

■ 대학들 대응 ‘제각각’ 

교육부가 수시에서 수능 최저학력 기준 폐지를 권고한 데 이어 박춘란 차관이 정시 인원을 늘릴 수 있는지 대학들에 문의전화를 돌린 뒤, 대학들 사이에선 사실상 정시 확대 목표치가 ‘30%’라는 얘기들이 흘러나온다. 몇몇 교육 전문지들은 “당국이 ‘30% 선까지 정시가 확대되면 좋겠다’고 했다”는 대학 관계자들의 말을 전했다. 지난해 교육부가 대학들에 전형료 인하를 요구하면서 내려보낸 액셀파일에 ‘25%’라는 수치가 들어있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미 확정된 2019학년도 서울 시내 주요 대학의 수시와 정시 선발인원 비율을 보면 고려대는 정시로 15.8%를 뽑고 나머지를 모두 수시로 선발한다. 서강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중앙대 등도 정시 선발 비율이 20~26%에 그치고 있다. 반면 연세대나 경희대, 한양대, 한국외대 등은 정시 비율이 30% 안팎이다. 김상곤 장관 등 교육부 고위간부들은 “정해진 비율 같은 것은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교육부가 일괄적으로 대학들에 가이드라인을 주지는 않았더라도 정시 모집이 적은 학교들에 비율을 끌어올리라는 압박을 했을 수 있다. 

4일 현재 고려대는 교육부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내년 입시에서 수능 최저학력 기준을 없애지 않는 쪽으로 방침을 정했다. 서강대, 중앙대, 한국외대도 유지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동국대는 논술 전형에만 있는 최저학력 기준을 완화하기로 했으나 성균관대와 경희대는 이미 수시에서 수능 최저학력 기준을 완화했기 때문에 그대로 유지한다는 방침이다.

■ 당황한 수험생들 

[2020학년도 대입 혼선]원칙 깬 교육부, 갑자기 ‘정시 확대’…교육감 선거 의식했나

수능 최저학력 기준을 없애는 것이 직접적으로 정시 선발인원을 늘리는 효과를 가져올지, 대학들 중 얼마나 교육부 방침을 따를지 아직은 불확실하다. 그러나 정부가 ‘고교교육 기여 대학 지원사업’의 지원금 등을 놓고 압박하고 있는 만큼, 기존 틀을 유지한다던 학교들도 언제 방향을 바꿀지 알 수 없다. 

당장 수능 최저학력 기준을 없애는 ‘목적’을 놓고도 교육부와 현장의 해석이 분분하다. 교육부 관계자는 “수능 최저학력 기준을 없애면 대학들이 (선발의 용이성 문제로) 수시 모집 인원을 마구 늘릴 수 없을 것으로 보고 폐지를 권고한 것”이라고 했다. 수험생들의 학습 부담을 줄여주고 대입을 단순화한다는 취지보다는 수시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에 ‘제동’을 거는 것이 우선적인 목적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수능 최저학력 기준을 없애는 것이 정시 모집을 늘릴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측이 엇갈린다. 수시 모집 경쟁률은 수능을 치르고 나면 크게 떨어져 왔다. 수능 최저학력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속출하기 때문이다. 연세대의 경우 2017학년도 입시 때 수시에서 최저학력 기준에 못 미친 학생들이 속출해 정원이 ‘이월’되면서 당초 30%선이던 정시 비율이 45%로 늘어났다. 한 수험생은 온라인 카페에 글을 올려 “최저기준이 폐지되면 그런 이월분이 없어져, 정시는 더욱더 ‘헬파티’가 된다”고 했다. 교육부가 보낸 ‘신호’가 완전히 거꾸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교육부 ‘권고’가 보도된 뒤 한 수험생이 ‘학생부종합전형 축소’와 ‘수능 최저기준 폐지 반대’를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을 올리자 8만명이 호응했다. 

■ 뒤로 가는 교육부 

정부는 그동안 ‘입시 3년 예고제’ 원칙을 강조해 왔다. 최소한 3년 전에는 입시정책의 방향을 정해 수험생들의 혼란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시 확대 독려’는 이 원칙을 스스로 깬 행위다. 내년에 대학입시를 치르는 고2 학생들은 이미 고교 6학기 중 3학기째다.

교육부가 진짜로 그동안의 방향에서 선회해 정시 확대로 가는 것인지, 과연 큰 틀의 로드맵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교육부 관계자는 “현장의 의견을 들어보니 정시 비중을 늘려 달라는 요구가 많았다”고만 설명했다. 그러나 만약 수시 비중이 급속히 늘어 ‘속도 조절’이 필요했다면, ‘입시예고제’에 따라 현 중3들부터 적용되는 새 틀을 공개적으로 논의했어야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문재인 정부는 여론을 광범위하게 수렴해 중장기 교육정책의 방향을 잡겠다며 국가교육회의까지 설치했다. 하지만 잇단 ‘헛발질’에 이런 취지는 무색해지고 있다. 이번 사태는 교육부가 방향성에 대한 논의 없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계산’에 따라 움직이면서 벌어진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깜깜이 전형, 금수저 전형으로 불리는 학종에 학부모들 반발이 거세지자 김 장관이 그동안 내세워 왔던 주장이나 교육부 흐름과 동떨어지게 ‘반짝 제스처’를 취해보려다 생긴 일이라는 것이다. 서울의 일반고 교사 하모씨는 “유불리를 떠나 최소한 학부모와 학생들이 예측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내년에 시험을 칠 아이들에게 적용될 입시계획을 가지고 교육부가 너무나 아마추어 같은 태도를 보여 선거용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말했다.


수능 최저기준 폐지 땐 ‘고교 서열화’ 부추길 수도


ㆍ입시전문가들 “대학들 내신 불신…학교 이름만 볼 것”
ㆍ비교과 활동·면접 변별력 중시 사교육 활성화 우려도

서울 대치동의 입시컨설턴트 손모씨는 “수시 모집에서 수능 최저학력 기준이 사라지면 대학들은 ‘고교 이름’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대학들은 학교생활기록부만 봐도 일반고 출신인지, 자사고 혹은 지방 고교인지 가늠할 수 있다”고 했다. 같은 ‘전교 1등’이라도 학교에 따라 내신점수 편차가 다르기 때문에 수능 최저기준으로 보완해왔는데 이런 장치가 사라지면 ‘고교’를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입시전문가들 사이에서 정부가 권고한 수시 최저학력 기준 폐지가 ‘풍선효과’를 불러올 것이라는 지적이 잇따른다. 현재 대입 전형은 수능 점수로 사실상 결정되는 정시, 학생부교과전형(내신)과 학생부종합전형(내신과 비교과활동, 면접 등)을 축으로 한 수시로 나뉜다. 수능 최저기준은 수시에서 일종의 정량평가 기준이 돼왔다. 그것이 사라지면 정량적 평가요소는 내신만 남는다. 문제는 대학들이 고교 내신을 불신한다는 점이다. 

서울 강북의 일반고에서 10년째 입시지도를 하고 있는 교사 이모씨는 “사교육을 받지 않는 학생들이 그나마 대학에 갈 수 있는 통로는 정시가 아니고 학생부종합평가”라면서 “이미 학종 확대로 방향을 잡아 놓고 교육부 스스로 원칙과 충돌하니 학생지도를 하는 입장에선 답답하다”고 말했다. 이 교사는 수능 최저학력 기준을 없애면 이를 충족시키지 못해 정시로 ‘이월’되던 입학정원이 오히려 사라져 정시 규모가 줄어들 것으로 보면서 “정시를 노리는 강남·송파 지역 학생들이나 특목고 학생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신성적이 잘 나오는 일반고 학생들에게 유리할 것이라 단언하기도 힘들다고 입시 전문가들은 말한다. 문재인 정부 출범 뒤 교육부는 자사고, 외고 등이 일반고보다 먼저 학생을 뽑게 해 우선권을 줬던 것을 바꿔 이런 학교들의 영향력을 줄이고 고교 서열화를 없애는 조치에 들어갔다. 그런데 대학입시에서 혼선된 메시지를 보내면서 오히려 고교 서열화를 부추기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비교과 활동이나 면접의 변별력을 앞세운 사교육 프로그램들이 생겨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서울의 한 입시전문가는 “일부 학원에서는 벌써부터 학생들에게 면접이나 비교과를 중시하라면서 지도에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