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일러스트|김상민 기자
정부가 국민 건강을 관리하는 핵심 지표를 설정할 때 여성과 남성을 따로 구분해야 더 형평성에 맞는 정책을 펼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성별에 따른 건강 불평등을 더 잘 들여다 보고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성가족부가 시행한 2017년 ‘특정성별영향분석평가’ 결과 일부를 소개합니다. 의학, 간호학, 사회학 등을 전공한 29명의 전문가들이 정부의 국민 건강 정책에 대한 기준이 되는 ‘제4차 국민건강증진계획’을 뜯어본 결과입니다. 특정성별영향분석평가는 여가부가 각 부처 주요 정책과 법령을 양성평등 관점에서 분석해 특정 성에 불리한 사항에 대해서는 소관부처에 개선을 권고하는 제도입니다.
흡연율 관리는 남성만?
정부는 국민건강증진계획에서 ‘금연’을 중점과제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2020년까지 흡연율을 29.0%로 낮추겠다는 것인데요, 흡연율은 매년 떨어지고 있는 추세여서 이 지표는 ‘개선’ 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지표가 남성 흡연율만 반영한다는 점입니다. 금연 목표치를 달성했는지 알아보는 지표는 ‘성인 남자 현재 흡연율’과 ‘중·고등학교 남학생 현재 흡연율’ 두 가지입니다. 국가가 이 두가지에 대해 목표를 세워 중점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국민건강통계 자료를 보면 남성 흡연율은 1998년 66.3%에서 대체적으로 떨어지는 양상을 보이면서 2016년 40.7%까지 떨어졌습니다. 반면 여성 흡연율은 남성보다 확연히 낮지만 떨어지지 않고 비슷한 수준을 계속 유지합니다. 1998년 여성 흡연율은 6.5%로 나타나는데, 2016년에는 6.4%입니다. 특히 20~30대 젊은 여성의 흡연율은 10% 안팎을 오르내리며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성정책연구원은 평가 결과 보고서에서 “여성은 특히 젊은 층에서 흡연율이 오히려 높아지는 경향도 보이는데, 남성 중심으로 설계된 대표지표가 여성에서만 나빠지는 부분은 놓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성별 흡연율 추이. e-나라지표 페이지 갈무리
전문가들은 ‘국민건강증진종합계획’의 건강 지표가 성별 구분 없이 설계된 경우가 많아 성 불평등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지적했습니다. 19개 대표지표 가운데 성별이 나눠진 것은 ‘절주’와 ‘비만’ 영역 뿐이었습니다. 유산소 신체활동 실천율을 따져보는 ‘신체활동’, 건강검진 받는 비율인 ‘일반검진 수검률’, 고혈압·당뇨병 유병률 등 나머지 지표들은 성별에 따라 관리되지 않습니다.
한편 ‘근로자 건강증진’ 관련 지표에는 성별 구분이 없을 뿐 아니라 남성 지표만 반영되기도 합니다. 육체 건강과 관련해서는 ‘남성 근로자의 현재 흡연율’, ‘남성 근로자의 고위험음주율’만 반영되고 있습니다. 이외 ‘근로자의 우울증경험률’ 등 지표는 성별 구분이 없습니다.
여성에게 더 많은 ‘관절염’은?
암과 심뇌혈관질환, 관절염 등 이른바 ‘만성퇴행성질환’을 관리하는 것도 국가의 주요 사업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여성에게서 뚜렷이 많이 나타나는 관절염의 경우도 관련지표에 성별 구분이 없습니다. 질병관리본부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50세 이상 성인 여성의 골관절염 유병률은 남성보다 세 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70대 이상 연령층에서는 여성 10명 중 3명(36.1%)이 골관절염을 겪고 있었습니다. 남성은 열 명 중 1명(10.4%) 꼴로 골관절염을 앓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나라 여성의 기대수명은 2016년 기준으로 85.4년, 남성은 79.3년입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6년 정도 오래 살게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아프지 않고 사는 ‘건강수명’은 어떨까요? 2016년 기준으로 여성은 기대수명의 76.4%인 65.2년, 남성은 기대수명의 81.6%인 64.7년으로 엇비슷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성은 오래 살지만 아프면서 살아가는 기간은 남성보다 길다는 뜻입니다.
사망 원인에도 차이가 컸습니다. 남성은 심혈관계질환 등 만성질환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고, 여성은 근골격계질환 등으로 삶의 질이 떨어진 후 죽음을 맞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왜 여성들은 노년에 더 아프게 됐을까요. 전문가들은 사회적 맥락까지 봐야 알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전문가들에게 사회에서 어떤 영역의 성별 격차가 완화돼야 여성의 건강수명이 늘어날 수 있을지 물었더니, ‘임금 수준’과 가족·돌봄 영역의 ‘가사노동 시간’과 가장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건강 형평성을 높이는 정책을 세우려면 일단 차이가 드러나도록 건강지표는 되도록 성별 구분해 쓰는 게 좋다고 전문가들은 권했습니다. 특히 핵심이 되는 ‘대표지표’는 전문가 80% 이상이 ‘성별 구분해야 한다’고 의견을 낸 것이 17개 중 14개입니다. 유산소 신체활동 실천율, 암 사망률, 건강검진(일반검진) 수검률, 고혈압·당뇨 유병률, 노인 자살률, 알코올 중독 평생 유병률 등도 성별을 구분해 들여다 봐야 한다는 겁니다.
건강이 어떻게 ‘불평등’한지 잘 알아보려면
건강 연구와 보건 정책이 남성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는 지적은 전 세계적으로 계속 나왔습니다. 여성 건강은 아이를 낳는 것과 관련해서만 주로 연구되거나 정책이 만들어져 왔다는 것이죠. 세계보건기구(WHO)는 1998년 젠더와 건강 세미나를 통해, 여성들에게 현재의 건강 정책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성별이 어떤 사람의 건강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여기서 성별이란, 생물학적으로 몸이 다른 것 뿐만 아니라, 사회가 그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하는지 등 사회구조와 문화적 환경까지 모두 포괄합니다.
각국이 참고하도록 WHO가 내놓은 핵심 건강지표는 100가지입니다. 이 가운데 47개는 성별이 구분되어 있고, 여성만 대상으로 하거나 남성만 대상으로 하는 특이지표까지 포함하면 총 62개는 성별 구분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여가부는 이같은 연구 결과를 토대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차별과 불평등을 더 많이 경험하고, 성별에 따라 건강의 위험요인과 수요가 다른데도 제4차 국민건강증진종합계획의 357개 지표 가운데 성별 구분이 된 지표는 34개에 불과했다”며 다음 계획 수립 때는 성별 구분 지표를 늘릴 것을 권고했습니다.
성별 이외에 건강 불평등을 보여주는 다른 요인도 더 고려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우리의 국민건강증진종합계획에 해당하는 미국의 헬시피플2020(Healty People 2020) 지표는 ‘성별’ 외에도 ‘지역’, ‘인종’, ‘장애’, ‘소득’, ‘교육’ 등과 같이 다양한 요인에 따라 결과를 비교할 수 있도록 설계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어떤 사람들이 건강에 더 취약한지 더 잘 알아볼 수 있겠지요. 2020년 이후 다음 10년을 내다보는 ‘제5차 국민건강증진계획’에서는 이런 지표를 찾아볼 수 있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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