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동기의 노트북을 빌려 쓰다가 ‘화장실 몰카’를 발견했어요. 너무 당황해서 일단 숨을 고르려고 카페 화장실로 들어갔는데 벽에 나 있는 구멍을 봤을 때, 그 순간의 좌절감이 정말 컸어요. 화장실만 문제인 것이 아니겠죠. 대중교통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제 모교에서도 불법도촬 사건이 있었어요. 집에서는 창문 너머로 누군가 찍고 있지 않은지 매일 의식해요. 그러니 일상이 긴장의 연속일 수 밖에 없는 거죠.”
여성가족부가 강남역 살인사건 2주기를 하루 앞둔 16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플라자 내 성평등도서관 ‘여기’에서 개최한 ‘성평등드리머와 함께하는 여성폭력 방지 정책간담회’에서 한 참석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정부에 정책을 제안하는 ‘성평등 드리머’로 활동하는 20대 여성 다섯 명이 참석했다. ‘여기’에는 살인사건 직후 시민들이 강남역 10번출구 인근에 붙인 포스트잇 3만5000여 건이 보관돼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과 ‘미투 운동’, 그리고 최근 35만 명이 넘게 서명에 참여한 “여성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성별 관계 없는 국가의 보호를 요청합니다” 청와대 청원은 모두 이어져 있다고 여성들은 입을 모았다.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수많은 여성들이 포스트잇에 썼던 “운이 좋아서 살아 남았다”는 문구가 보여주듯, 여성들은 여전히 집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불법촬영과 수사·사법기관의 미온적 대처는 가장 뜨거운 주제였다. ‘홍대 누드모델 불법촬영 사건’과 관련해서 이례적으로 수사당국이 신속하게 나서 범인을 붙잡은 것은 “바람직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럼에도 ‘남성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을 신속수사한 것을 놓고 ‘편파’ 논란이 벌어진 것은 그동안 여성들이 겪은 좌절감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이처럼 ‘정상적’인 과정이 모든 불법촬영 사건에 적용돼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그동안 ‘몰카’를 찍은 현직 판사나 국가대표 운동선수, 의사 등이 집행유예를 받거나 약식기소에 그쳤잖아요.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여성들은 무력감과 분노, 우울감에 시달립니다. 이런 상황이 이번에 국민 청원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해요.” 지난 11일 ‘피해자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동등하게 수사해 달라’는 취지로 올라온 청와대 청원 글에는 닷새 만에 35만 명이 넘게 동의했다.
온라인에서 여성에 대한 공격이 심각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 참석자는 “얼굴을 드러내고 활동가로 일하다 보니 온라인에서 성희롱과 인격 모독을 자주 당한다”며 “충격과 우울감에서 벗어나 대처를 하려 하면 이미 댓글을 모욕죄로 고소할 수 있는 6개월이 지나가 처벌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건정 여가부 여성정책국장도 “최근 성평등 문화 사업의 하나로 힙합 가요를 만드는 일을 추진했는데, 여성 가수를 섭외했더니 악성 댓글이 너무 많이 달려 (당사자가) 상처를 받아 결국 남성 가수를 다시 섭외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담회에 참석한 정현백 여가부 장관은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해 “여성이라는 이유로 늘 안전을 위협받는 것은 ‘나의 문제’이고 ‘우리의 문제’라는 정서적 공감이 굉장히 컸다”며 “이것이 계기가 돼 일상화된 차별과 폭력에 저항하는 사회적 연대 움직임이 굉장히 활발해졌고, 그런 점에서 올해 일어난 미투 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고연주 서울시 젠더자문관은 강남역 살인사건이 미투 운동의 시작점이라는 데에 동의하면서 “화장실에서, 영화관에서, 온라인에서, 심지어 집에서까지 불안에 떨어야 하는 상황이 그동안 얼마나 달라졌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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