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를 알려주면 그거대로 풀면 나오니까 흥미 없고 로봇처럼 푸는 느낌이에요.” (중학교 1학년 안모양)
‘수포자(수학포기자)’. 고학년으로 될수록 수포자는 늘어난다. 교육부가 지난해 발표한 전국 중·고교생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고교 남학생 10명 중 1명의 수학 과목 이해능력은 학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할 수준인 ‘기초학력 미달’ 상태로 나타났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수학사교육포럼은 “암기와 일방주입식 수업에 맞춘 수학 교과서가 원인”이라고 말한다.
수학사교육포럼의 최수일 대표를 비롯한 38명의 수학교사가 몇년 간 머리를 맞대고 만든 대안교과서 <수학의 발견>이 최근 출간됐다. 이 책은 ‘아이들의 발견에 수학 공부의 주도권을 맡기는 교과서’를 표방한다. 수학사교육포럼이 12일 서울 마포도서관에서 연 <수학의 발견> 북콘서트에는 예상 인원의 2배인 300여명의 학부모와 교사들이 참석했다. 참가 신청자가 너무 많아 콘서트 장소를 바꾸기까지 했다. ‘새로운 수학교육’에 대한 갈증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포럼은 책의 취지와 구성을 프리젠테이션, 집필진 토크쇼, 퀴즈쇼 등으로 소개하고 2년간 실제 학교에서 이 교과서로 수업한 결과를 보고했다. <수학의 발견>은 기존 교과서와 어떻게 다를까.
■ ‘소수’가 발견된 원리를 따라서
‘소수’는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눌 수 있는 수를 말한다. 기존의 교과서에서는 소수를 찾는 방법을 아래와 같이 간단히 보여준 후 넘어간다.
인류에게는 아직 단번에 통하는 ‘소수 확인법’은 없다. 그리스 수학자 에라토스테네스의 ‘체(걸러내는 도구)’를 지금도 활용하는 이유다. 기존 교과서의 방법도 거기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기존 교과서는 에라토스테네스의 방식을 보여주기만 할 뿐, 에라토스테네스가 소수를 알아내기 위해 ‘체’를 고안한 과정을 경험해 보게 하는 데에는 소홀했다.
<수학의 발견>은 어린 시절부터 배운 ‘자연수’ 속에 ‘소수’라는 것이 있으며 소수는 ‘깨어지지’ 않는 수라고 표현하고 이를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그래서 질문을 아래와 같이 바꿨다. ‘2의 배수 중 소수를 찾으라’고 말이다. 애초 에라토스테네스가 ‘체’를 발명한 과정을 그대로 겪어보게 하기 위해서다.
‘2의 배수 중 소수가 아닌 나머지’를 지운다면 ‘2’밖에는 남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2의 배수 중에서는 오직 ‘2’만이 1과 자기자신(2)으로만 나눌 수 있는 소수임을 알게 된다. 이어 3, 5 등의 배수들에게도 같은 과정을 거친다.
■ 수학도 ‘토론’해야
<수학의 발견>의 특징은 문제를 풀 때마다 그렇게 푼 이유를 스스로 쓰게 하고 친구들과 토론하게 한다는 점이다. 이 책의 해설서를 보면, 한 학생이 1부터 100가운데 2, 3, 5의 배수를 지워 소수를 구하고 발표를 한 사례가 나온다. 그러자 다른 학생들이 49, 77, 91은 소수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학생들은 7의 배수도 지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어 학생들은 1~100 중에서 소수를 구할 때 11이나 13의 배수도 지울 필요가 있는지 논의한다.
칼 세이건의 소설을 영화화한 <콘택트>도 등장한다. 영화에는 외계에서 온 신호음을 분석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신호음의 파동 간격이 2, 3, 5, 7, 11, 13, 17…이다. 모두 소수다. <수학의 발견>은 이런 간격으로 신호음을 보낸 외계 생명체가 뛰어난 문명을 지녔을 것이라고 천체 물리학자들이 결론을 내는 장면을 소개하면서, 왜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해 보게 한다.
또 소수가 암호를 생성하는 데 활용된다는 것, 상금까지 내걸고 세상에서 가장 큰 소수를 찾는 수학자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29와 31이라는 두 소수를 곱하면 899가 나오는데, 899를 보고 언뜻 29와 31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규모가 큰 소수 두 개의 곱은 연상 효과가 낮기 때문에 풀기 힘든 암호가 되는 것이다.
■ 수학은 원래 생각의 도구였다
수학사교육포럼은 <수학의 발견>이 “학생을 귀찮게 하는 교과서”라고 말한다. 자꾸만 무엇을 발견했는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쓰게 하기 때문이다. 선행학습을 한 학생은 ‘생각쓰기’를 싫어한다. 집필진 중 한 명인 서울 상암중학교 권혁천 수학교사는 “선행학습을 한 아이들은 숫자로 푸는 것부터 해결한 뒤 ‘다 풀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을 쓰는 걸 귀찮아 한다”면서 “그런 의식을 바꾸는 게 어려웠다”고 말했다. 선행학습을 하지 않아야 ‘배우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교과서인 셈이다.
친구들과 토론하면서 더 나은 결론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주도성과 토론이 빠지면 안 된다고 집필진들은 설명한다. 논리적인 사고를 위해 탄생한 것이 수학이기 때문이다. 역시 집필진으로 참여한 이경은 서울사대 부속중학교 수학교사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수학이 중요했던 이유는 철학적, 논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토론을 하기 위해서였다”면서 “수학의 원래 모습을 학교현장에서 되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수학의 발견>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본 강원도 사북중학교 오정 수학교사는 “잘 모르겠다 싶으면 멈추고 아무것도 안 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이 교과서로) 생각을 해보자고 하면 자신감을 가지고 쓴다. 엉뚱한 얘기를 쓰기도 한다”면서 “아이들이 ‘잘 못하지만 이것 하나는 깨달았어’ 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수학사교육포럼은 이미 17개 학교에서 1694명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했고, 아이들의 소감을 9일 북콘서트에서 소개했다. 수학을 “로봇처럼 푸는 느낌”이라고 했던 안모양은 <수학의 발견> 수업에 대해 “예전에는 모르면 그냥 포기했는데 지금은 어려운 게 나오면 답을 몰라도 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중학교 2학년 김모군은 “모둠활동을 통해 스스로 풀어내는 시간이 재미있고 발표도 많이 하게 된다”면서 “선생님이 풀어주시면 ‘그냥 이런 거구나’ 하고 다시 안 풀어보는 경우가 많은데, 친구들과 풀면 ‘쟤는 저렇게도 나오네’하고 한번 더 풀어보게 된다”고 했다.
가정에서 자녀에게 <수학의 발견>을 풀어보게 한 학부모 구본남씨는 “학원에 다니지 않은 아이가 수업시간에 질문을 하면 (선행학습을 한) 친구들이 ‘너는 그것도 몰라’ 하니까 자신감이 많이 없어졌는데, 이 책은 아이의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끄집어내도록 하니까 ‘내가 수학에 감각이 있구나’ 하고 느끼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문제의 정답을 알려주면 틀렸다며 한숨을 땅이 꺼지게 쉬었는데 <수학의 발견>으로 공부하면서 목소리 옥타브가 올라가더라”고 덧붙였다.
서울 한울중학교 정혜영 교사는 “이 교과서는 열려 있는 질문이 많아서 생각에 따라 답이 여러 개 존재한다”면서 “수업 중에 평행한 선에 대해 얘기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좁은 평면에서가 아니라 지구라는 관점에서 (학생이) 얘기해 깜짝 놀랐다. (‘수학의 발견’ 수업은) 학생들의 생각이 다양하고 다채롭다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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