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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고 배우기

[인터뷰]“역사교육, 독일의 원칙서 배워야” 이동기 교수가 말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소동’ 이후

문재인 정부가 국정 역사교과서를 폐기한 지 1년이 됐다. 지난 3일에는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새 교육과정과 집필기준 시안도 공개됐다. 역사교육을 고민하는 전문가들은 국정화 파동을 되돌아보며 역사교육의 적절한 방향과 원칙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가야 할 시점이라고 말한다. 독일의 ‘역사교육 헌법’으로 불리는 ‘보이텔스바흐 합의’와 같은 한국의 역사교육 원칙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진영논리를 벗어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소개하고 학교 현장에서 토론과 논쟁을 통해 성숙한 역사인식을 가질 수 있게 하자는 뜻이다. 국내에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소개한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52)를 지난 13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나 이 합의의 의미와 내용, 실제 현장에서의 적용 방안 등을 들었다.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연구해온 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가 지난 13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했다.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교과서 이념전쟁’을 겪은 서독에서 1977년 탄생한 정치·역사교육에 관한 ‘최소 합의’다. 김영민 기자


- 보이텔스바흐 합의란.

“유럽을 휩쓴 진보적 학생·시민운동인 6·8봉기를 거치면서 1970년대 독일에서는 비판적 교육이념이 확산됐다. 보수정당인 기민·기사연합이 정권을 잃고 사민·자민 소연정이 구성되면서 사회과 교육에서 이념논쟁이 벌어졌다.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역사교육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보이텔스바흐 합의다. 역사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논쟁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다양한 해석을 놓고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을 정립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 사회 영역에서 벌어지는 논쟁들을 교실 안에서 학생들이 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이 합의의 기본 원칙 중 하나다.”

- 40여년 전 독일의 합의를 지금 한국에서 논의해야 하는 이유는.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소동이 3년간 이어지다가 결국 검정체제로 환원됐지만 사회적 비용이 너무 컸다. 교육을 둘러싼 갈등이 원칙에 대한 논의로 이어져야 한다. 국정화를 추진했던 비민주 세력이 힘을 잃으면 바로 교육이 안정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다원주의를 전제로 한다. 교육에서도 이견이 늘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바탕에서 역사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를 만들 필요가 있다.”

- 국정교과서를 폐기하고 정부가 역사교과서 새 집필기준을 내놨다.

“집필기준 시안의 방향은 옳다고 본다. 뉴라이트 세력 등은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라는 문구가 사라진 것을 두고 문제를 삼는데 여기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1948년 12월12일 한반도 문제에 관한 유엔 결의문의 맥락을 보면 ‘남한 영토에서의 실효권 행사’라는 점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정치 영역에서 실제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면, 학교에서도 이 논쟁을 다룰 필요는 있다고 본다. 존 스튜어트 밀은 ‘진리는 오류와의 싸움을 통해 발현된다’고 했다. 학생들에게 그런 과정을 익히게 해야 한다. 물론 이럴 경우 특정 논란을 지나치게 부각시킬 위험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 직접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면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 논란을 다루겠는가.

“나라면 다룰 것이다. 다만 해방 후 역사에 관한 대목이 아니라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에 관한 항목을 만들어 가르칠 것이다. 뉴라이트의 문제제기로 일어난 논란, 그 후 이어진 국가권력의 역사교육에 대한 횡포와 개입을 가르치겠다.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 논란을 설명하면서 유엔 결의문의 전체적인 맥락과 해석에 대한 차이 등을 그대로 알릴 것이다. ‘그들의 해석은 억지이니 빼버리고 바른 해석만 소개하자’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독일 역사교과서들은 역사교육을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한 사례들까지 서술하고 있다. 과거 서독도 동독의 공산주의 체제를 비판할지언정 동독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도록 가르치지는 않았다. 나치즘과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놓고서도 우파는 히틀러를 비롯한 소수 엘리트의 잘못에 초점을 맞춘 반면 좌파는 근본적으로 독일 근대사가 잘못된 길을 걸어왔음을 강조했다. 이 논쟁들이 역사교육에서도 그대로 다뤄졌다.”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격렬한 역사교과서 논쟁 속에서 탄생했다. 합의를 탄생시킨 주역은 기민련에 소속된 지그프리트 실레라는 보수파 교육학자였다. 이 교수가 공저자로 참여한 <보이텔스바흐 합의와 민주시민교육>을 보면 보수파인 실레가 교육에서만큼은 ‘최소 합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나온다. 우연히 보수진영의 정치교육 토론회에 간 그는 교육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하지 않고 ‘우리(보수우파)’가 좌파의 비판이론을 어떻게 ‘격퇴’할 것인지만 얘기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좌우 대표적 교육이론가들을 보이텔스바흐라는 지역에 초청해 토론회를 열었다. 이 토론회에서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으나 한스게오르그 벨링이라는 학자가 정리한 당시 토론집에 ‘일방적 주입 금지’ ‘논쟁의 재현’ ‘학생 스스로 이해관계의 인지’라는 세 원칙이 담기면서 ‘보이텔스바흐 합의’로 불리게 됐다.


- ‘학습자 중심 원칙’이라는 세 번째 원칙은 어떤 것인가.

“역사·정치교육이 헌법 조문이나 정치제도에 대한 학습에 그쳐서는 안되며 실제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는 과정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로서 어떤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지를 배우고 이를 행동에 옮기는 것 등이 해당한다. 어떤 역사 선생님은 이 원칙의 모범사례로 위안부 문제를 접한 학생들이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 행사에 참여한 것을 들더라. 어떤 학생은 그런 행동으로 연결하겠지만 다른 학생들은 슬픈 감정과 함께 깊은 고민에 빠질 수도 있다. ‘그때 신은 어디 있었는가’ ‘인간의 선과 악’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하며 헤어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역사교육 혹은 민주시민교육은 정치행동에의 참여를 이상화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요구에 걸맞은 정치주체로서 스스로를 성장, 발전시키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 반인권적 입장이나 독재를 옹호하는 입장도 교실에서 논쟁할 수 있나.

“경계는 세워야 한다. 예를 들면 파시즘은 민주주의 사회의 한 의견이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를 파괴하는 범죄다. 명료한 역사적 사실을 호도하는 것도 ‘견해’라고 인정해선 안된다. 극우정당이 의회에 들어와 있는 독일에서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사례들을 놓고 보면 경계선이 명확하지 않을 때가 있다. 함께 숙고하며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 교사는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 옳은가. 성적이 중요한 한국에서, 학생들이 교사의 견해에 휘둘릴 수 있지 않을까.

“교사의 적절한 역할에 대해서는 하나의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주제와 상황, 학생들의 태도에 따라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다만 교사가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려면 명료한 논증을 세우는 모습과 함께 다른 견해를 존중하며 절제하는 태도, 토론 과정에서 견해를 수정할 수 있다는 열린 태도를 보여줘야 한다. 때로 교사가 자기 견해를 숨기고 상반되는 견해를 지지하며 논쟁을 진행할 수도 있다. 교사들이 여러 방식을 시도해보고 성과와 한계를 토론하며 나아가는 게 중요하다.”

- 서독의 좌우 진영이 역사교육을 도구화하지 않겠다고 한발씩 물러서면서 보이텔스바흐 합의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일단 국가권력이 정치교육을 유린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원칙부터 세워야 한다. 보수진영은 학문적 논쟁이 아닌 언론이나 정치세력을 통한 선동적 개입을 삼가야 한다. 진보세력에게도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예를 들어 ‘1919년 건국설’만 옳다고 주장하는 대목은 우려스럽다. 1948년 정부 수립이 심각한 국가폭력과 정적 제거 등 민주적 정당성이 발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19년 건국론을 부정하는 순간 뉴라이트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문제도 논쟁 재현의 원칙에 따라 여러 견해를 소개하고 토론하도록 해야 한다. 진보진영도 협소하고 획일적인 시각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했으면 좋겠다.”

- 실제 교실에서 논쟁적인 교육이 이뤄지려면 평가체계도 바뀌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독일의 역사시험은 텍스트를 분석하고 자신의 입장을 논증하게 하고 있다. 나치 독일의 외교정책과 서방국가들의 대응, 뮌헨협정 등에 관한 사료와 해석을 4~5개 제시한 뒤 학생들에게 250분의 긴 시간을 주고 견해를 논증하게 하는 식이다. 역사교과서, 교실에서의 수업뿐 아니라 평가 방식도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