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 절차를 밟으면 간단히 해결 될 일입니다. 삭제를 위한 제출 서류는 공지사항에 있습니다.”
얼굴이 드러난 성적 촬영물이 ‘썸네일’로 올라온 것을 알게 돼 이를 지워 달라 하니 사이트 운영자는 이런 답을 보내왔다. 회원가입을 하고 이미 한 차례 삭제 요청을 했는데 탈퇴시켜버려서 또다시 가입해 재문의하자 돌아온 메시지였다. 운영자는 ‘법적 절차’를 운운했지만, “당사자를 대신해 삭제를 요청한다”는 내용의 정식 문서를 갖춰 보내도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사이트 폐쇄만이 답…이달 중 200곳 고발할 것”
비영리단체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한사성) 서승희 대표는 이런 일을 수도 없이 봤다. 불법 촬영해 유포한 사진이나 영상으로 고통받는 피해자를 도와 일일이 삭제 요청하는 과정에서다. “게시판이 없으면 운영자 이메일 주소를 추적해 메일을 보내요. 답이 없어요. 서버가 해외에 있어 손댈 수 없을 거라 생각하니까요. 업체들은 피해자가 계속 나와야만 돈을 벌어요.”
유튜버 양예원씨 폭로로 수면위에 떠오른 ‘스튜디오 비공개 촬영회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모델 모집을 담당한 한 남성이 지난 22일 경찰 조사를 받기 위해 마포경찰서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한사성은 그동안 모니터링한 불법 포르노사이트 200곳을 이달 중 경찰에 고발하고 사이트 폐쇄와 운영자 처벌을 촉구할 계획이다. 한사성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막으려면 경찰이 국제공조로 수사하고 사이트를 닫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주장한다. 서 대표는 “경찰이 국제 공조수사를 활발히 하겠다고 밝힌 만큼 이제는 대대적인 인지수사에 나서 이 사이트들이 폐쇄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에 서버를 둔 불법 사이트들은 도메인 등록부터 운영까지 모든 과정에서 국내법을 피해 간다. 회원으로 가입해야 콘텐츠를 보거나 글을 쓸 수 있고, 게시물을 지워달라고 요구하면 가입자 계정을 차단해 버린다. 다시 가입해 또 요청해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 유튜버 양예원씨의 사진들이 올라온 ㄱ사이트도 이런 곳 중 하나다. 회원제로 운영하면서 개인 문의는 받지도 않았다. 공지사항을 띄워 “삭제 문의는 ㄴ디지털장의사업체에 하라”고 했다. 영상 삭제를 전문적으로 하는 다른 민간 사이트를 내세운 것이다.
양씨의 폭로로 경찰이 수사에 나서자 ㄱ사이트는 접속이 차단됐다. 24일 경찰이 양씨 사진을 처음 퍼뜨린 20대 남성을 검거했지만, 이 남성은 자신도 양씨 사진을 다른 곳에서 퍼날랐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촬영물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회원수가 100만 명이 넘는다던 소라넷은 2016년 4월 폐쇄됐지만, 또다른 소라넷들은 계속 생겨난다.
‘죽지 않는’ 사이트들
정부도 올해부터 예산을 들여 피해자들 대신 유포된 촬영물을 삭제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여가부가 운영하는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가 문을 연 뒤 289명이 지원을 요청했다. 방송통신심위원회(방심위)도 지난달 디지털성범죄대응팀을 꾸려 불법 촬영물을 긴급심의하고 있다.
그러나 공공기관조차 불법 포르노사이트 자료를 삭제하게 할 강제 수단이 없다. 방심위는 사업자에게 콘텐츠를 지우라고 요구하고, 해당 게시물이나 사이트에 이용자들이 접속하지 못하도록 차단한다. 하지만 ‘우회 접속’이나 사이트 주소를 바꿔버리는 것을 막을 길은 없다. “피해자에겐 하루가 긴데…. 국내 인터넷망을 이용해 접속을 차단하지만 이 사이트들은 곧바로 URL을 바꿔가며 실시간으로 차단을 피해가거든요.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으면 국내에선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어요.”
지워도 지워도 불법 촬영물은 계속 다시 온다. 박성혜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 삭제팀장은 “기술과 인력부족만이 문제가 아니다. ‘국산 야동’이라는 이름으로 성범죄 촬영물을 소비하는 문화가 있는 한 재유포를 막을 길이 없다”고 말했다. 디지털 정보의 복사는 너무 쉽다. 그런 촬영물을 찍고 퍼뜨리고 보는 것이 범죄라는 인식이 남아있는 한 피해자는 완전히 구제를 받기 힘들다.
국내 불법 촬영물 유통 경로는 크게 웹하드, 소셜미디어(SNS), 불법 포르노사이트 세 가지다. 한사성이 지난해 5~12월 받은 피해 상담들을 분석해보니 불법 촬영물 131건 가운데 37.8%인 50건이 불법 포르노사이트를 통한 피해였다. 다음이 SNS(25.5%), 웹하드(14.3%) 등 순이었다. 웹하드는 과거엔 불법촬영물의 주된 유통경로였으나 지난해부터 정부가 적극 대응하면서 많이 줄었다. 국내 웹하드업체들은 사업등록을 하고 전기통신사업법에 따라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 규제를 받기 때문이다. 박 팀장은 “국내 웹하드 회사들은 삭제 요청을 하면 대부분 사흘 안에 지우고, 페이스북 등 SNS 회사들도 미국 저작권법에 따라 협조를 하는 편이다. 하지만 해외에 서버를 둔 불법 사이트들은 관리자조차 찾을 수 없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해외 서버? “미국 법도 바꾸자”
정부는 국제 공조수사를 더 활발히 하겠다는 방침을 여러 차례 내놓은 바 있다. 소라넷을 폐쇄할 때 경찰은 네덜란드 측과 공조수사해 메인 서버를 압수했다. 미국과 유럽은 아동 대상 성범죄를 엄격하게 처벌하기 때문에 수사가 신속하게 진행되는 편이지만 성인 촬영물의 유통은 수사를 끌어내기 쉽지 않다.
▶ 경찰청 사이버안전국 사이버수사과장 인터뷰(2017년 10월6일)
경찰 수사가 자꾸 국경에 가로막히자 한사성은 미국과 대만, 일본, 호주 등에서 사이버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전문가들과 국제연대체를 만들 계획이다. 국제 연대로 문제를 풀겠다는 것이다. 28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한사성 관계자가 대만을 방문하고, 다음달 말에는 미국 사이버성폭력 피해자 지원 단체인 ‘사이버 시민권리 구상(CCRI)’과 만나 미국 법 개정도 논의한다. 한사성은 “한국 피해자들의 피해촬영물이 해외 불법 사이트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며 “수사당국이 더 적극적으로 국제공조를 펼치기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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