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민주노총의 ‘노사정 사회적 대화’ 복귀에 ILO도 최대한 지원
“노동기본권 문제는 좌·우파를 가르는 기준이 아닙니다. 인권과 기본권의 문제입니다.” “한국 노동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을 넘어서,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 논의해야 합니다. 그 과정은 사회적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야 합니다.”
노동 기본권과 사회적 대화. 지난 4일부터 6일까지 한국을 방문한 가이 라이더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이 남긴 메시지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나라 전체의 체불임금 규모가 1조원이 넘고, 노조 조직률은 10%대를 맴도는 실정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노동권의 국제기준인 핵심협약을 비준해 밑바탕을 다지고, 이후 다양한 문제제기와 의견을 받아들여 성장의 발판을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라이더 총장이 2박3일의 빠듯한 일정 속에 청와대와 정부, 노동조합과 경제단체를 두루 만나며 줄곧 강조한 내용이다.
라이더 총장은 방한 마지막 날인 6일 민주노총을 찾아 “ILO 회원국이라면 핵심협약 비준의 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핵심협약 문제는 한국에 도착한 첫날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자마자 언급했을 정도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기도 하다.
ILO 핵심협약은 노동 기본권에 대해 가맹국들이 맺은 ‘약속’이다. 1919년 기구 설립 이후 생긴 협약은 180개가 넘는다. 그 중에서 ILO가 “꼭 지켜야 한다”고 선정한 핵심협약은 8개다. 1991년 ILO에 가입한 한국은 그 절반인 4개를 아직 비준하지 않았다. 특히 ILO와 노동계는 자유로운 노조 설립과 활동을 보장하는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제87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원칙의 적용에 관한 협약(제98호)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 정부는 ILO와 노동계가 “추리고 추려 낸” 이 협약들이 국내법과 충돌한다며 26년째 비준을 미루고 있다. 공무원과 교사, 해고자의 노조 가입을 금지한 노조법·교원노조법·공무원노조법 등을 개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교조와 공무원노조가 ‘법외노조’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것도 그래서다.
라이더 사무총장은 “한국의 법과 관행이 어떤 점에서 국제노동기준과 부합하지 않는지 밝혀냈고, 법 개정 방향도 이미 상세히 제시한 바 있다”라며 “결사의 자유 협약을 비준하고 이행하는 것은 맨땅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비준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는 “문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핵심협약을 즉시 비준해야 한다는 점을 호소했다”라고 했다.
핵심협약 비준은 그야말로 기초 지반을 다지는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 임금격차, 일자리 창출 등 노사정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들을 조율하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려면 대화와 타협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는 6일 한국노총을 찾았을 때에는 “소득과 경제성장이 함께 작동하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서는 사회적 대화가 필수적이다”라며 “노사가 제 역할을 찾고 정부가 지원한다면 새로운 사회적 대화 체계가 만들어져 원만히 작동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라이더 총장도 “사회적 대화가 어려운 것은 본질적 속성”(5일 노사정위원회 방문 시)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한국의 대화기구인 노사정위원회는 박근혜 정부 노동개혁의 ‘들러리’가 되는 등 줄곧 노동계의 불신의 대상이었다. 민주노총은 1999년 정리해고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이미 탈퇴했다. 라이더 총장이 “한국의 사회적 대화는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하고 일방의 이익을 추구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신뢰 쌓기가 중요하다고 역설한 것도 그래서다. 그는 “새로운 사회적 대화가 출발하는 데 양대 노총이 모두 복귀하지 않는 등 어려움이 생긴다면, ILO에서 최대한 지원할 준비가 돼 있다”고 덧붙였다.
라이더 총장은 영국의 공업도시 리버풀에서 나고 자랐다. 1980년 영국 최대 노조연맹인 노동조합회의(TUC)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ILO 사무총장 비서실장, 국제노동조합총연맹(ITUC) 사무총장 등을 거쳐 2012년 ILO 사무총장 직에 올랐다. 정부 관료가 아닌 노동운동가 출신이 ILO 사무총장에 취임한 건 처음이라 주목을 받았다. ILO 수장의 방한은 2006년 부산에서 열린 ILO 아시아태평양지역 총회에 후안 소마비아 당시 총장이 참석한 이후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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