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던 수당을 만들어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을 받는 거죠. 하지만 중소기업 현실에서는 쉽지 않네요.” 경기 안산에 있는 중소 제조업체 ㄱ사 노동자 윤승태씨(가명·52)가 지난달 31일 기아차 통상임금 판결에 대해 한 말이다. ㄱ사는 폐지를 가공해 골판지·상자 등을 만드는 업체다. 시급은 신규 입사자 기준 그 해 법정 최저임금에 불과하다. 대신 매년 기본급의 600%에 해당하는 정기상여금을 두달에 한 번씩 나눠서 준다.
■영세·중소기업 여전히 ‘상여금 미포함’…장시간 노동 사각지대
24시간 공장이 돌아가기 때문에 직원들은 주간 11시간, 야간 13시간 맞교대로 일한다. 법으로 정한 하루 노동시간인 8시간보다 매일 3~5시간 더 일하지만 손에 쥐는 연장근로수당은 많지 않다. “정기상여금도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는 2013년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에도 ㄱ사는 기본급만 놓고 시간외 수당을 계산해왔기 때문이다. 이 회사 신입 직원이 연장근무를 할 때 받는 돈은 시간당 1만원(올해 최저시급 6470원×1.5배)이 채 안 된다. 법원 판결대로 정기상여금까지 포함해 수당을 다시 계산하면 그보다 더 받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근로기준법은 연장·야간·휴일근로를 한 노동자에게 통상임금의 50%를 더 붙여 주도록 하고 있다. 통상임금의 액수가 높아지면 수당이 늘고, 장시간 노동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기아차노조에 이어 근로복지공단 노조도 지난 3일 통상임금 소송에서 이겨 통상임금에 상여금을 포함시키게 됐다. 그러나 이런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노동자들과 달리, ㄱ사 같은 영세·중소기업 노동자들은 여전히 적은 돈을 받고 장시간 노동에 내몰린다.
기아차 노조 소송을 대리한 김기덕 새날 변호사는 “완성차업체는 주간연속 2교대를 도입하는 등 노동시간이 많이 줄었지만 중소기업과 군소 납품업체는 여전히 장시간 노동이 일반적”이라며 “통상임금 문제는 초과근로를 많이 하는 이런 사업장에서 더욱 절실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한 경남지역 노조 관계자는 “대법원 판례대로 사측과 다퉈 볼 수는 있지만 사업장이 작을수록 노조가 없는 곳이 많고, 있다 해도 조직력이 약해 장기간 법정 다툼이 녹록지 않다”고 했다. 근로기록 등 체불임금을 입증할 자료조차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사용자들의 ‘최저임금 꼼수’ 저임금 비정규직은 속수무책
ㄱ사 노동자들에게는 통상임금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최근 회사는 정기상여금 600% 중 250%를 기본급으로 전환시키겠다고 했다. 올해 최저임금은 작년보다 7.3% 올랐다. 그러자 정기상여금을 기본급에 슬그머니 ‘녹이는’ 방식으로 최저임금법 위반을 피해가는 것이다. 최저임금에는 ‘1개월 단위로 지급되는 기본급과 수당’만 들어간다. 분기·반기별 혹은 두 달에 한 번씩 지급되는 정기상여금은 포함되지 않는다. 상여금을 기본급에 나눠넣으면 최저임금을 올리나마나다. 윤씨는 “최저임금이 오르는 만큼 월급도 오를 거라 기대하던 동료들이 많이 실망했다”고 말했다.
ㄱ사 뿐만이 아니다. 대형마트 ㄴ사는 무기계약직 직원들에게 기본급의 400%에 해당하는 성과급을 매년 두 차례 나누어 지급해 왔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그중 절반을 12달 똑같은 액수로 나눠 주기로 했다. 최저임금이 7% 넘게 올랐지만 실제 임금이 오른 폭은 2%밖에 되지 않았다. 직원 박모씨(48)는 “내년 최저임금은 올해보다 16% 오르기 때문에 나머지 200% 상여금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얘기가 돈다”며 “실질적으로 월급이 늘지 않는 조삼모사 임금”이라고 했다.
사용자들은 상여금 비중을 줄이고 월 정액급여를 늘려 임금체계를 ‘정상화’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실상은 다르다. 안산 ㄱ사처럼, 일부 상여금만 기본급으로 돌려 최저임금에 간신히 맞추고 나머지 상여금은 아예 없애 임금총액은 그대로인 경우다.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에 해당할 수 있지만 회사와 교섭할 힘이 없는 노동자들은 대응하기 어렵다. 민주노총 법률원의 권두섭 변호사는 “상여금의 ‘고정성’을 없애기 위해 지급요건을 추가하기도 한다”며 “통상임금에 상여금이 포함될 근거도 없어지고, 임금 총액이 올라가는 것도 피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상여금 성격 왜곡, 임금체계 개선 시급”
문제의 핵심은 장시간 싼값에 일시키는 수단으로 변질된 ‘정기 상여금’에 있다. 1960~70년대만 해도 상여금은 문자 그대로 회사 영업이 잘 됐을 때 주는 보너스, 혹은 성과를 낸 직원들에게 주는 인센티브였다. 하지만 산업발전이 궤도에 오르면서 기업들은 24시간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본급을 낮추고 나머지는 상여금 같은 특별급여로 채웠다. 상여금은 사실상 임금임에도 통상임금에 포함되지 않았다.
2013년 대법원 판결 이후 대기업·공공기관 노동자들은 상여금까지 포함된 통상임금으로 “마땅히 받았어야 할 임금(기아차 판결)”을 받게 됐다. 그러나 중소기업·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소송은 그림의 떡이고, 임금 격차는 갈수록 벌어진다. 최저임금이 올라가면서 기업들의 꼼수도 늘어, 저임금 노동자의 생계를 보장해준다는 취지마저 빛이 바랬다. 통상임금에는 상여금이 들어가야 하는데 이 원칙은 나몰라라 하고, 최저임금에는 상여금이 들어가지 않는데 ‘쪼개기’로 집어넣는 이중적인 행태다.
최저임금 제도개선위원회는 통상임금뿐 아니라 최저임금에도 정기, 고정상여금을 포함시키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이견도 적지 않다. 당장 노동계가 반대한다. “수당을 산정하는 기준인 통상임금과 생계비를 보장하기 위한 최저임금은 애초에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과로를 부르는 왜곡된 임금체계를 고치는 게 먼저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장원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기본급이 전체 급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0%정도에 불과한데 이를 70%정도로 높이고, 상여금이나 수당 비중을 줄이는 임금체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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