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이 사진을 찍은 분이 당신 맞나요?”
새 학기 강의 준비로 한창 바쁘던 지난해 1월, 킴 뉴턴 미국 애리조나대 교수(65)는 이런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전날 모습을 담은 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1987년 7월8일에 그가 찍은 것이었다. 발신자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며 “한국에 와서 진행을 맡아 달라”고 했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외신기자로 사진 취재를 했던 미국 애리조나대 킴 뉴튼 교수가 8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31주기 추모제를 보며 사진을 찍고 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처음에는 진짜인지 의심했다. 한국에서 일하는 동료들을 통해 수소문하니 프로그램 제작진이 맞는 것같았다.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하는 것을 보고 떠난 이래 한 번도 한국을 다시 찾은 적이 없던 그였다. 최루가스가 가득하던 서울 거리는 지금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해 응하기로 했다. 그렇게 한국과의 인연이 다시 이어졌다.
두 달 뒤인 작년 3월 초, 인천공항에 내리자 제작진이 반갑게 맞았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가 한창이던 때였다. 한동안 ‘현장’을 떠났던 그는 열흘 간 서울에 머물면서 그는 다시 사진기자로 돌아갔다. 한 손에는 태극기, 한 손에는 성조기를 들고 나온 탄핵 반대 시위 참가자 중에는 그가 지나가면 ‘미국인’이 반가워서 환영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 없이 사람들이 시위를 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지금이 1987년이었으면 이곳은 최루가스로 자욱했을 거예요.” 시청광장의 태극기 집회 현장을 찾은 그의 말이다.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 결정을 내리던 날에도 그는 시위 현장에 있었다. “1987년에 내가 카메라에 담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알게 된 느낌입니다.” 그는 한국에서 30년의 시차를 두고 목도한 변화의 순간들이 “민주주의 그 자체”였다고 했다.
31년 전 미국 기자의 카메라에 담긴 한국, 그후 다시 찾아와 또 한번 혁명의 순간을 바라보는 기자. 시차를 두고 계속된 역사의 장면들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11일 오후 11시10분 전파를 탄다. <MBC 스페셜> 6월항쟁 특집 ‘어머니와 사진사’다. 민주화 운동의 한가운데에서 아들을 잃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 이야기와, 열사 장례식 사진을 찍은 뉴턴의 이야기를 나란히 엮었다.
당초 ‘6월항쟁 30주년’ 특집으로 지난해 내보낼 예정이던 이 프로그램은 결국 한 해를 넘겨 방영되게 됐다. 뉴턴이 이미 진행자로 결정된 상황에서 MBC 경영진은 지난해 2월 돌연 다큐 제작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담당 PD는 다른 부서로 발령났고, 뉴턴을 불러 촬영한 것과 관련해 징계까지 내렸다. 흩어졌던 제작진은 지난해 12월 최승호 사장이 취임한 뒤에야 다시 모여 마무리 작업을 할 수 있게 됐다.
다큐 제작은 곡절을 겪었지만, 한국과의 인연이 이어지면서 뉴턴의 방문도 잦아졌다. 지난해 3월에 이어 6월에는 6월항쟁 30년을 만나 다시 한국에 왔고, 제작진은 휴가를 내고 작업을 계속했다. 뉴턴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다큐를 계속 제작해 방영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편지를 보내면서 “앞선 세대에게는 성취를 상기시켜주고 젊은 세대에게는 역사를 알려줄 것”이라고 다큐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전날인 1987년 7월 8일 당시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이던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총학생회 사회부장이던 배우 우현씨가 고개를 숙이고 이한열 열사를 애도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도 문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이 편지와 사진 선물은 문 대통령이 6·10항쟁 30주년 기념식에서 공개하면서 알려졌다.
마침내 방영을 앞두고 막바지 작업에 들어간다는 소식에 뉴턴은 다시 서울을 찾았다. 지난 9일 서울 상암동 MBC 사옥에서 마지막 녹음을 마친 그를 만났다. 뉴턴은 1년 간 늦춰진 것에 대해 “(제작진이) 옳은 일을 하고 있으니 잘 될 것으로 믿고 기다렸다”고 했다.
그에게 한국은 언제나 역사의 생생한 현장이다. “(탄핵 국면에서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몰랐어요. 하지만 제작진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방영)될 것’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됐죠.” 1년 만에 다시 오니 이번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이 코앞이다. “정말이지 한국은 월드뉴스에 계속 나오네요. 세계가 다 주목하고, 무슨 일이 일어날 지 궁금해 하고요.”
제작진이 찾아낸 1987년의 영상에는 뉴턴의 모습이 곳곳에 등장한다. 방독면을 쓰고 현장을 누비던 그의 젊은 시절 모습도 다큐를 통해 볼 수 있다. 당시 프리랜서 사진기자이던 뉴턴은 이후 로이터통신 런던지부, 미국 트리뷴뉴스서비스 등의 국제사진에디터를 맡았고 2007년부터는 애리조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을 취재한 것은 “저널리스트로서 굉장한 경험”이라고 그는 말했다. “역사의 큰 퍼즐에 나도 한 조각으로 들어 있었고, 아주 미미하게나마 좋은 일에 기여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죠. 기록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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