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이 갑, 제작사가 을, 조명이나 카메라 감독급이 병이라면 우리 같은 프리랜서들은 정이죠, 정.”
김두영 방송스태프노조 위원장(49)은 4일 서울 여의도의 한 커피숍에서 이같이 말했다. “흔히 방송 스태프들을 두고 철저한 ‘을’이라고 표현한다”고 하자 무섭게 답이 나왔다.
15년 경력의 발전차 기사인 그는 이날 출범한 방송스태프노조의 초대 위원장이다. 노조는 작가, 독립PD, 조명, 장비, 카메라, 분장 등 방송 제작 현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다. 특정 직군이 아닌 방송 제작 종사자를 모두 포함하는 최초의 노조로, 민주노총 서울본부 희망연대노조에 둥지를 틀었다. 출범 첫날 이미 1000여명이 동참했다.
4일 출범한 방송스태프노조의 김두영 위원장은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잠 좀 자자’는 스태프들의 요구가 현실이 될 수 있게 하겠다”며 방송제작 현장 스태프들의 살인적인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을 첫 번째 과제로 삼겠다고 말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김 위원장은 한 드라마 촬영 일정표를 내밀었다. 새벽 6시 현장으로 출발해 밤 11시 반에 해산한다. 다음날에도 출발은 새벽 6시. 하루를 꼬박 새고 그다음날 새벽 4시가 돼야 끝난다. ‘사람을 갈아넣는다’고 표현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모든 스태프들이 한번 현장에 나가면 파죽이 돼서 와요. 제작 현장에 가보면 다들 눈이 퀭합니다.”
김 위원장은 일반 회사를 다니다 친구 소개로 방송조명 일에 뛰어들었다. TV에서만 보던 연예인들이 눈앞에 있어 그저 신기했다. 한동안은 밤 새는 게 힘든지도 모르고 재미있게 일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신나는 것도 한계가 있더라”라고 말했다. 열심히 일을 하고도 임금을 받지 못했다. 발전차에서 떨어져 어깨를 다쳤지만 15일치 입원비는 고스란히 김 위원장 몫이었다. 제작사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젊은 후배들은 여전히 자신과 똑같이 고통을 받고 있다. 아끼는 후배가 임금을 떼여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2016년 드라마스태프협회를 꾸렸고 노조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방송계가 노동시간 단축으로 고민에 빠진 지금, 방송 제작 현장 인원의 90%를 차지하는 비정규직 스태프들은 여전히 살인적인 노동시간에 시달린다. 근로기준법 보호를 받는 법적 근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조는 스태프들의 노동시간을 줄이고 근로자성을 인정받는 것을 첫 번째 과제로 삼았다.
방송사들은 ‘탄력근로제’를 해법으로 들고 나왔지만 비정규직 스태프들에겐 ‘독’이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정규직들은 3개월 집중해서 드라마 만들고 4개월 유급휴가를 가는데, 저희는 3개월 일하고 벌이 없이 놀아야 한다”고 말했다.
스태프들이 개별적으로 계약서를 작성하게 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지금은 각 팀의 팀장이 대표로 계약해 스태프들에게 일감을 나눠주는 구조다. 문제가 생겨도 제작사나 방송사는 책임에서 자유롭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방송 스태프가 되려는 청년들은 거의 없다. 김 위원장은 “조명팀 알바로 들어온 친구도 일주일 해보고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면서 안 나온다. 어쩌다 돌부리에 걸려 한두 명이 일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이어 “소품팀, 장비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만큼 방송 제작 환경이 최악의 조건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이날 아침 노조 출범 기자회견에서, 저녁에 열린 창립총회에서 두 번 마이크를 잡았다. 초등학교 반장 때 이후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해본 적은 처음이어서 많이 긴장했다고 했다. 아직은 “노동운동 새내기”라며 “앞으로 방송 제작 현장의 불합리와 신나게 싸울 것”이라고 했다. 첫 일정으로 방송 제작 현장을 방문해 비정규직 스태프들에게 ‘노조의 탄생’을 알릴 계획이다. “우리 스태프들이 죽겠다며 ‘잠 좀 자자’고 하는 요구가 현실이 될 수 있게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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