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동계올림픽이 끝난 지 석 달이 지나도록 흉물스럽게 방치된 강원 정선의 가리왕산 스키장 개발에 대해 시민단체가 감사를 청구하기로 했다. 눈이 녹은 뒤 드러난 자갈밭에서 ‘총체적 부실’의 흔적을 확인한데다 장마철을 코앞에 두고 재난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현장 조사에 나선 전문가들은 2011년 서울 우면산 사태같은 재난이 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지난달 수해가 휩쓸고 간 가리왕산 알파인스키 경기장을 지난 9일 하늘에서 본 모습. 가리왕산 스키장은 평창동계올림픽 이후에도 복구나 재해예방대책이 마련되지 않아 장마철을 앞두고 심각한 재난 우려가 나온다. _ 정지윤 기자
“지금 복원을 얘기할 상황이 아니에요. 당장 사람이 살고 봐야죠.” 지난 9일 환경단체 녹색연합과 전문가들이 정선군 북평면 가리왕산 스키장을 찾았다. 조사에 동행한 임재은 산림기술사는 곳곳이 패인 채 호박돌이 굴러다니는 산기슭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달 17~18일의 집중호우는 벗겨진 산의 처참한 속살을 드러냈다. 당시 시간당 최고 30㎜, 이틀간 80㎜의 비가 내렸다. 스키장 슬로프였던 경사면이 무너져내리고 토사에 깎여나간 나무뿌리가 드러나 있었다.
비 쏟아지자 곳곳에 흙더미
스키장 진입로도 토사에 덮였다. 보도블럭은 빗물에 쓸려 사라졌다. 산사태 우려에 스키장 아래 주민 6명이 대피하기도 했다. 지난 3월 국가안전대진단 당시 모의실험에서는 시간당 75.2㎜ 집중호우에 산사태가 발생하는 걸로 나타났으나 그 절반 강도의 비에도 산이 허물어졌다. 수해가 난 지 3주 만에 찾아간 가리왕산은 흙의 물기만 마른 상태였다. 스키장 초입의 리조트는 황량한 자갈밭을 배경으로 여전히 영업중이었다. 장마철을 앞두고 이토록 방치된 상황이 기괴할 정도였다.
스키장은 산봉우리 사이 계곡을 흙과 돌로 덮어 만들었다. 올림픽과 패럴림픽을 위해 500년 된 숲도 밀어냈다. 임 기술사는 “이제는 복원이 아니라 복구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했다. 맑은 계곡물이 오대천으로 이어지고 이끼 낀 둥근 돌들이 절경을 만들던 옛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스키장을 지을 때 복원을 염두에 뒀다면 계곡의 돌들을 모아두고 위치와 지형을 꼼꼼히 기록했어야 하지만 “그냥 토목공사 하듯” 덮어버렸다고 했다. 장차 복원하면서 옮겨심겠다며 다른 지역에 이식한 주목과 전나무, 분비나무 등 272그루 중 상당수는 이미 고사했다.
이제는 생태계가 아니라 주민들 안전을 걱정할 판이다. 축구장 66개 면적을 훼손한 가리왕산 스키장의 평균 경사각은 29도이고 경사가 급한 곳은 40도가 넘는다. ‘부실 공사’의 흔적은 널려있다. 토사가 넘친 진입도로 옆에 배수관이 보였다. 지난달 빗물에 쓸려온 흙으로 배수관이 막히자 흙탕물이 사면을 타고 여기저기 흘러내렸다. 배수 계획 자체가 부실했던 것이다. 뒷날 산림을 복원하겠다고 했으면서도 시설물을 땅에 묻었고, 건설기간 작업도로도 폭 12~15m로 넓게 내면서 불필요하게 산을 파헤쳤다. 대규모로 산을 깎을 때 사면이 무너지지 않도록 사방공사를 해야 하는데 이마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굴삭기로 파낸 듯 침식 흔적
스키장들은 여름에는 풀밭으로 변한다. 큰 나무는 베어내더라도 초본류는 그대로 둬서 눈이 녹으면 싹을 틔우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풀마저 덮어버린 가리왕산 슬로프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돌이 발에 채였고 흙먼지가 등산화를 덮었다.
“토양에도 층이 있어, 맨 위의 부식층이 쿠션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가리왕산은 속흙이 드러나 비가 오면 깎여나갑니다.” 임 기술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1차 침식을 ‘우격’이라고 부른다. 이어 비가 흙사이에 완전히 스미면 경사지 전면의 얇은 토양층이 이동하는 면상침식, 흙표면에 잔 도랑이 생기면서 깎이는 누구침식이 일어난다. 실제로 사면에 여기저기 도랑이 생긴 게 보였다.
“그러고 나면 굴삭기로 파낸 것처럼 구곡침식이 일어납니다. 가리왕산 여기저기에 구곡침식으로 볼 흔적들이 많습니다. 마지막은 계곡으로 흙이 쏟아져내리는 하천침식입니다. 다 벗겨지는거죠.” 임 기술사는 “계획 단계부터 마지막 감리까지, 총체적으로 문제가 보인다”고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정도 비에 초토화될 수 있냐는 것이다.
올림픽 때 관중석이 설치됐던 곳 주변에서 포크레인 한 대가 잔해물을 치우고 있었다. 황량한 산골 사이로 공사장같은 소음이 메아리쳤다. 가파른 슬로프는 폭 2m 남짓한 야자매트에 덮여 있었다. 흙이 떠내려가지 말라고 설치한 것이다. 지난달 호우 뒤 배수관 토사를 치우고 몇몇 구간에는 콘크리트 더미로 물막이 공사를 했다.
경사면 주변에 시침바느질을 한 듯 듬성듬성 곤돌라 타워가 이어졌다. 슬로프 중턱 곤돌라 정거장에 다다르자 조사단의 탄식이 터져나왔다. 어른 키만큼 패인 물골을 따라 나무뿌리들이 드러나 있고 그 옆에 기둥이 쓰려져 있었다. 배전시설은 밀려든 흙에 찌그러졌고, 철제 울타리는 엿가락처럼 휘어져 돌에 파묻혔다. 눈밭을 헤치던 선수들의 기록을 적어놓은 화이트보드는 흙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지난 호우로 붕괴된 슬로프 중턱의 모습. _ 배문규 기자
“개발 모든 과정, 감사 청구”
가리왕산의 결정적 시간은 2014년이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 환경부가 ‘경기 이후에 복원한다’는 조건으로 개발을 허가했다. 산림청도 복원을 하겠다는 강원도의 말만 믿고 500년 원시림의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을 풀어줬다. 나무 10만 그루가 베어졌다. 일주일 쓰자고 2064억원을 들였다.
토사에 휩쓸린 울타리가 엿가락처럼 휘어져있다. _ 배문규 기자
올림픽은 끝났고, 1000억원의 복원 비용이 계산서로 돌아왔다. 강원도는 지난 1월 가리왕산 스키장 100만여㎡ 중 호텔과 도로가 있는 아래쪽 19만여㎡를 뺀 81만여㎡를 5년 동안 복원하고 50년 동안 관리한다는 계획을 산림청에 냈다. 하지만 구체적이지 못해 중앙산지관리위원회 심의에서 떨어졌다. 강원도가 제시한 복원사업비 477억원은 어림없는 액수라는 지적도 나왔다. 아직 계획도 못 잡았으니 복원공사는 2~3년이나 지나야 시작될 것으로 환경단체들은 우려한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강원도에서는 ‘2021년 동계아시안게임을 남북 공동 개최하면서 재활용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공동개최를 하게 되면 상징성이 큰 북한 마식령스키장을 이용할 가능성이 크다. ‘지방 소외’가 가리왕산을 망가뜨린 근본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지자체들은 대규모 행사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배제선 녹색연합 자연생태팀장은 “개발에서 소외됐던 지역의 반응이 어느 정도는 이해된다”고 했다. 다만 “가리왕산 복원은 오랜 갈등 끝에 사회적 합의로 결정된 것이니 당초 약속대로 최대한 자연에 가깝게 복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개발과 자연 보전에서 중요한 선례를 남기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손으로 할퀸듯한 슬로프를 지나 매표소에 도착했다. 문은 굳게 잠겼고, 정선군번영연합회가 붙인 “환경단체의 머슴인 환경청은 각성하라” “경기장내 시설, 장비 매각 및 반출 절대불가!”라는 현수막이 여기저기 걸려있었다. 복원을 둘러싼 지난한 줄다리기가 벌어질 것이 눈에 선했다. 배 팀장은 “산림청이 급한대로 이달 중순부터 배수로 정비 등 응급조치를 취한다고 하는데, 소모적인 갈등을 끝내고 관련기관들이 복원에 협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녹색연합은 이달 안에 감사원에 스키장 개발에 대한 공익감사를 청구할 계획이다. 감사대상기관은 강원도, 산림청, 환경부 등이다. 복원을 전제로 개발했다면서도 불필요하게 파헤쳤고, 허가기관들이 관리를 소홀히해 난개발이 벌어진 점, 산사태 등 재해방지를 위한 기본작업이 전혀 되지 않고 구체적인 복원 계획조차 세워지지 않은 점 등 개발의 전 과정에 대해 감사를 요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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