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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부 “주 52시간 위반 처벌, 최대 6개월 유예”

남지원·이효상 기자 somnia@kyunghyang.com

ㆍ이낙연 총리 “계도기간 거쳐 현장 연착륙 필요”…청와대와 사전협의
ㆍ노동계 “최저임금 이어 또 사용자 편들기…사실상 시행 미룬 것” 반발

다음달 1일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의 주당 최대 노동시간이 초과근무를 포함해 52시간으로 못 박히지만, 당분간 이를 위반해도 사업주가 처벌을 받는 일은 없게 됐다. 기업들의 준비 시간이 부족했다는 여론이 일자 정부가 최대 6개월의 ‘시정기간’을 주기로 했다.

고용노동부는 노동시간 단축이 적용되는 사업장에서 노동시간 위반 사항이 적발되더라도 당장 수사에 착수하는 대신 시정기간을 주기로 했다고 20일 밝혔다. 장시간 노동을 줄이려면 근무형태를 바꾸거나 사람을 더 뽑아야 하니, 사업주를 처벌하기 전에 먼저 시정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겠다는 것이다.

시정기간은 일단 3개월로 하고, 필요한 경우 3개월 더 줄 수 있도록 했다. 시정기간을 한 차례 더 연장할 수도 있어, 기업들로서는 최대 6개월까지 처벌을 면할 수 있게 된다.

근로감독관은 시정기간에 사업주가 시정지시를 이행하면 ‘내사 종결’처리하지만 이행하지 않을 경우 범죄로 보고 수사에 착수한다.

근로기준법에는 사업주가 노동시간을 어기면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돼 있다.

김영주 장관은 “노동시간 단축이 현장에 안착해 긍정적인 효과를 내려면 사업주가 이를 지킬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한시적으로 현장의 연착륙에 중점을 두고 계도해나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노동부 관계자는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은 사실 준비에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보지만, 300인 이상 사업장에 포함되는 중소기업과 중견기업들은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2월28일에야 국회를 통과했기 때문에 준비기간이 짧았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다만 “충분히 시정할 기회를 주겠다는 취지일 뿐이며, 정부의 선의를 악용한다면 처벌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노동부의 결정은 올해 말까지 6개월의 계도기간을 달라는 경영계 요청과 이를 받아들인 고위 당·정·청 회의 결과에 따른 것이다.

이날 이 총리는 국회에서 열린 고위 당·정·청 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 “근로시간 단축 시행 자체를 유예하긴 어렵고 시행은 법대로 하되 연착륙을 위한 계도기간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전날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제안에 따라 정부와 청와대가 계도기간 도입에 대해 사전 협의를 나눴다고 밝혔다.

이어 시정기간을 두겠다는 노동부의 발표가 나오자 노동계는 “최저임금법 개악에 이어 정부·여당이 또다시 사용자 편들기에 나섰다”며 반발했다. 길게는 반년까지 처벌을 유예한 것은 제도 취지를 퇴색시키고 사실상 시행을 미룬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은 “지금 당·정·청이 할 일은 처벌을 면해줄 묘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편법과 꼼수를 엄중 감독하고 처벌할 대책, 삭감될 임금을 보전할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기업에 밀려 후퇴…‘준비 부족’ 드러낸 정부

<b>나란히 앉은 총리와 노동부 장관</b> 20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8 전국 지방자치단체 일자리대상’ 시상식에 이낙연 총리(오른쪽)와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이 참석해 나란히 앉아 있다. 연합뉴스

나란히 앉은 총리와 노동부 장관 20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8 전국 지방자치단체 일자리대상’ 시상식에 이낙연 총리(오른쪽)와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이 참석해 나란히 앉아 있다. 연합뉴스

다음달 1일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에 적용되는 노동시간 단축에서 위반사항이 나와도 최장 6개월간 처벌을 면해주겠다고 하면서 정부는 인력충원 등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한 중견·중소기업을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기업들 반발에 밀려 노동시간 줄이기를 사실상 반년 미루겠다는 것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현행 노동부 근로감독관 집무규정에 따르면 근로감독관은 노동시간을 어긴 사업장에 최대 7일의 시정기간을 줄 수 있으며 사업주가 요청하면 이를 7일 연장할 수 있다. 그런데 노동시간 단축을 열흘 앞둔 20일 고용노동부는 3개월씩 최대 2번에 걸쳐 시정기간을 줄 수 있게 한 ‘보완조치’를 내놨다. 최장 14일이던 시정기간을 6개월로 크게 늘린 것이다.

노동부의 ‘3개월+3개월 시정기간’ 조치는 한국경영자총연합회(경총) 등 기업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고위 당·정·청 협의를 통해 결정됐다. 당초 경총은 계도기간을 둘 것을 제안했고 청와대와 정부가 이를 검토했으나,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사용자의 처벌을 하지 않는 것은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될 수 있어 ‘시정기간’을 늘리는 방안을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부는 노동시간을 어긴 사업주를 사법처리할 때 “그간 노동시간을 준수하기 위한 사업주의 조치 내용 등도 수사해 처리하겠다”고 했다. 노동부가 수사에 착수하더라도 사업주가 법을 지키려고 ‘노력한 점’이 인정되면 검찰에 송치할 때 최대한 ‘선처’를 받을 수 있도록 반영하겠다는 것이다.

법을 어겨도 처벌을 미룬다면 사실상 기업들이 노동시간을 단축해야만 하는 시기가 6개월 미뤄지는 것이 된다며 노동계는 반발하고 있다. 이미 기업들 사정을 감안해 고용인원에 따라 단계적으로 시행계획을 잡았는데 한 발 더 후퇴하게 됐다는 것이다. 다음달 당장 주 52시간 노동시간 단축이 적용되는 기업은 300인 이상 사업장들이며 50~299인 사업장에는 2020년 1월, 5~49인 사업장에는 2021년 7월에야 적용된다. 단계적 시행 자체가 유예기간인 셈이다.

민주노총은 “300인 이상 기업이 아직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건 핑계”라며 “당·정·청이 근로기준법을 무력화하면서까지 처벌을 면제해주려 편법을 부리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노총도 “정부와 여당이 최저임금 개악에 이어 또 사용자 편만 들고 있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노동 존중 사회를 실현하는 정책을 포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처벌을 유예받는 기간에 기업들이 노동시간을 줄여 새 일자리를 만드는 대신 ‘편법’을 모색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은 “회사가 노동강도를 올리고 업무를 외주화하거나 단기계약직 노동자를 집어넣는 방법으로 일자리를 늘리지 않고 법을 피해가려 한다는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며 “300인 미만 사업장이 법망을 피해갈 시간을 1~3년 더 주더니, 대기업들에까지 도주할 기회를 6개월 더 준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시간 단축이 경제에 줄 충격을 경영계가 과장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주 52시간 노동’을 놓고 일각에선 한국 건설기업들의 해외 수주에 차질을 빚을 것이며 연간 기업들의 손실이 많게는 수십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노동전문가들은 “주 52시간 한도는 결코 짧은 노동시간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주 5일 일을 한다고 할 때, 매일 8시간 근무하고 2시간24분을 초과로 더 해야 주 52시간이 된다. 점심·저녁 1시간씩을 휴게시간으로 잡는다고 치면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24분까지 일해야 되는 것이다.

노동부 고용보험 피보험자 통계를 보면 300인 이상 사업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전체 상용근로자의 15.5%인 275만1000명이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이 지난 1월 낸 보고서를 보면 5인 이상 사업장에서 주 52시간 넘게 일하는 사람은 현재 96만명으로 전체의 11.8%였다.

정부는 손실을 과장하는 기업들을 설득하고, 준비작업을 감독하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등 치밀하게 준비했어야 했다. 그런데 제도 시행을 열흘 앞두고 사실상 연기에 준하는 결정을 내린 것은, 정부 스스로 준비가 부족했음을 드러낸 것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정부는 지난달 노동시간 줄이기가 일자리 나누기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기업 지원책들을 내놨다. 노동시간 단축 뒤 신규 채용을 하는 회사에 인건비 지원액을 늘리고, 일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기존 노동자들의 소득을 보전해주는 기업에 대한 지원도 확대한다고 했다. 하지만 지원 방안마다 까다로운 조건들이 붙어 있어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기업들은 주장한다.

어디까지를 노동시간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도 노동부는 시행 3주 전에야 매뉴얼을 내놨다. 그마저도 법원 판례와 행정해석 등을 종합정리한 수준이었다. 집중노동이 필요한 업종들에서는 탄력근로제 등 유연근무제를 활용하겠다는 요구가 크지만 이와 관련된 매뉴얼은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탄력근로제를 하게 되면 노동강도가 높아지고 노동시간 단축이 사실상 무력화될 수 있다고 노동계는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