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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뉴스]한국전쟁, 파괴된 일상과 되찾은 평화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국사편찬위원회가 한국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을 앞두고 한국전쟁 사진자료 중 일상과 평화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는 사진 14장을 공개했다.

국편은 “최근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기대감이 부쩍 높아지는 상황에서 한국전쟁 당시의 일상과 평화를 담은 사진자료의 의미는 남다르다”며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이 누구인지, 평화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들은 국편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이다. 국편 전자사료관 누리집(http://archive.history.go.kr)에서도 열람할 수 있다. 아래는 국편이 공개한 사진 14장과 설명.

■고향을 등진 피난민 가족(1951. 3. 1.)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잃고 길을 나선 피난민 가족의 모습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통사람들의 평온한 일상은 송두리째 파괴되었다. 남이건 북이건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의 가재도구만 짊어지고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군인과 피난민(1950. 7. 7.)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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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국군을 비롯해 전세계에서 파견된 군인들이전선(戰線)으로 급히 투입되었다. 고향을 등진 피난민들은 전쟁을 피해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전선으로 향하는 군인의 행렬과 전선을 피해 피난을 떠나는 피난민의 행렬이 서로 엇갈리는 모습이다.”

■신분검사(1950. 10. 15.)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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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병사가 민간인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신분증을 살피고 있다. 이념에 따라 편이 나뉘면서 같은 조선사람끼리도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한국이 낯설었던 미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과 불안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우리 사회를 지배했다.”

■어머니와 아들의 이별(1950. 12. 18.)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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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초기의 전황은 매우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그 때문에 신병 보충 역시 긴급하게 이뤄졌고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입대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입대 직전의 신병이 대구역에서 열차에 오르기 직전 어머니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다.”

■‘부대 마스코트(unit mascot)’(1950. 9. 23.)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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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사람을 가리는 것은 아니지만, 어린이나 노인, 여성 등 사회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전쟁으로 겪는 고통은 특히 더 컸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 중 일부는 ‘부대 마스코트(unit mascot)‘라고 하여, 미군 부대에서 허드렛일을 거들며 부대와 함께 다니기도 했다. 이들 중 몇은 전쟁이 끝난 후 미국으로 정식 입양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속의 소년 역시 부모를 잃고 미군 부대에 들어간 ’부대 마스코트‘이다. 소년이 미군에게 커피를 퍼주고 있다.”

■원산의 아이들(1950. 10. 31.)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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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점령하의 원산 인근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부대 인근 마을에 살던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동생을 등에 업은 채로 친구들과 놀고 있는 모습이 수십 년 전의 여느 시골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진이 촬영되고 약 2개월이 지난 후 공산군이 원산을 점령했고, 공산군의 산업 중심지였던 원산은 다시 유엔군의 주요 폭격대상이 되었다.”

■폐허가 된 원산(1950. 11. 8.)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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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성이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자신의 집터에서 쓸만한 물건을 찾고 있다. 이곳은 원산 시내로, 원산은 공산군의 산업 중심지이자 주요 항구였기 때문에 폭격의 주요 목표였다.”

■전쟁 속의 일상(1951. 8. 22.)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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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에도 사람들은 일상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전쟁이 한창이었던 탓에 일손도 농기구도 부족했지만 사람들은 어떻게든 제 할 일을 해내고 있었다. 낱알을 터는데 쓰고 있는 드럼통은 아마도 군부대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를 두고 미군은 ‘투박해 보이지만 무척 효율적(seems crude, but is very effective)’이라는 메모를 남겨두었다.”

■휴전회담을 위해 처음 만난 유엔군과 공산군(1951. 7. 8.)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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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양 당사자인 유엔군(오른쪽)과 공산군(왼쪽)은 1951년 7월 8일 개성에서 열린 휴전회담 예비회담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다. (본회담은 7월 10일 시작) 이 날부터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를 위한 길고 긴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오른쪽의 유엔군 측 연락장교는 제임스 머레이 대령(제일 위), 앤드류 키니 대령(검은 모자 쓴 이), 이수영 중령(바로 아래의 안경 쓴 이)이다.”

■‘타임’지를 읽는 북한군과 미군 병사(1951. 7. 8.)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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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이뤄지는 와중에 북한군 병사와 미군 병사가 함께 ‘타임(Time)’지를 읽고 있다. 사진 속의 타임지는 1951년 6월 16일자로, 표지의 인물은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매튜 리지웨이다.”

■다시 열린 시장(1951. 3. 19.)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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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수복된 후,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시장을 여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시장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하기도 했고, 일자리를 알아보기도 했다. 잃어버린 가족을 우연히 다시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전쟁의 충격은 컸지만, 일상을 되찾으려는 사람들의 본능 역시 그만큼 끈질겼다.”

■다시 일하는 수선공(1950. 10. 28.)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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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수선공이 군인의 전투화를 수선하고 있다. 이 자리는 원래 이 수선공의 가게가 있던 자리였지만, 전쟁이 발발하면서 가게와 주변이 모두 폐허가 되고 말았다. 서울 수복 후, 수선공이 자기 가게가 있던 자리에서 다시 영업을 시작한 것이다. 사진을 찍은 미군은 “이 군인이 수선공의 첫 손님”이라는 메모를 남겼다.“

■북한의 철도 복구(1954. 4. 27.)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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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곧바로 전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남북 모두 전쟁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기 위해 오랜 기간 땀을 흘려야 했다. 이 사진은 북한에서 촬영된 것으로 전쟁으로 파괴된 철로를 복구하는 모습이다.”

■복구된 한강인도교(1954. 12. 18.)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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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에 여러 차례 파괴되었던 한강인도교 역시 전쟁이 끝난 후 곧 복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