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바지를 한 번 입어 봤더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어요. 밑위는 여성복보다 훨씬 길었고, 구김이 잘 가지 않는 ‘링클프리’ 제품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어요. 게다가 허리 안쪽에 고무가 들어 있어 바지 않에 셔츠를 넣어도 옷이 말려 올라가지 않았고 값도 여성복보다 훨씬 쌌고요. 트위터에서 여성들이 ‘남자 옷을 사 입으라’는 ‘생활 팁’을 공유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죠.”
여성 직장인 ㄱ씨는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경험담을 내놓았다. 옆에 앉아 듣던 ㄴ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장바지 뒷주머니를 보여줬다. “주머니라곤 이것 뿐인데 그마저 가짜예요. 남자 옷에서 이런 것 보신 적 있나요.” 이전에는 불편하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살았다고 했다. 두 사람은 지금 ‘여성소비총파업’ 기획에 참여하고 있다. 온라인에서만 소통하다 이날 처음 만났다.
“여성이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 1970년 아이슬란드 여성총파업에서 슬로건을 따 왔다. 방법은 좀 다르다. 일 손을 놓는 대신 지갑 열기를 멈춘다. 소비를 자제해 아낀 돈은 세계여성의날(3월8일)을 상징하는 ‘38’이 찍히게끔 각자 저금한다. ‘총파업’ 첫 날로 지정됐던 지난 1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줄줄이 ‘인증샷’이 올라왔다. 여성들은 있던 약속을 취소하고, 도시락을 싸고, 버스 대신 자전거를 탔다고 했다.
여성소비총파업의 기대효과를 설명한 포스터. |페이스북 ‘여성소비총파업’ 페이지
왜 ‘소비’를 멈추는 파업일까. 몇 달 전 한 여초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 발단이었다. “현생(생활)이 있으니 출근 안 하고 뛰쳐나가는 건 무리더라도…. 하룻동안 금전 소비 안하기 이런 방법으로 나라 굴러가는 데 여성이 없으면 얼마나 치명타인지 깨닫게 해주고 싶어.” 조용히 묻혀 있던 이 글은 불법촬영 범죄에 대한 경찰의 ‘편파수사’를 규탄하는 서울 종로구 ‘혜화역 시위’가 커지던 국면에 다시 주목을 받았다. 뜻 있는 여성들이 카카오톡 채팅방에서 머리를 맞댔다. 수도권 외 지역 여성들도 참여해 효능감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나왔다. 각자 실천하고 SNS에서 기록을 공유하는 방식을 택했다.
“스트레스 풀려고 옷이며 화장품을 사 모으는 건 이제 그만 하려고요.” ㄴ씨는 소비파업이 강요된 여성성을 거부하는 ‘탈코르셋’ 운동과도 밀접하다고 했다. “여성이 아무리 뛰어난 사회적 성취를 이뤄도 아름답지 않으면, 남자에게 인기가 없으면 가치가 없다는 인식을 사회가 계속 심어 주니 그런 쪽으로만 돈을 쓰게 되잖아요.” ㄱ씨도 동의했다.
“돈을 벌기 시작한 후 부터 ‘꾸밈 노동’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없어요.” ㄴ씨는 패밀리레스토랑의 첫 아르바이트 얘기를 꺼냈다. 화장을 안 하고 나갔더니 ‘맨 얼굴로 서빙 볼 생각이냐’는 소리가 돌아왔다. 첫 월급은 화장품이며 스타킹을 사는 데 다 썼다. “남성과 똑같이 받아도 결국 ‘동일임금 동일노동’이 아닌 거죠.”
그래서 매달 첫째주 일요일, 돈을 쓰는 대신 적금을 넣자고 했다. 은행을 고를 때는 여성을 많이 뽑는 곳, 여성 임원 비율이 높은 곳을 선택하기로 했다. “여성에게 물건을 팔겠다는 기업들도 ‘이대로 하면 안 사 주는구나’ 하고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자 옷도 남자 것 만큼 다양한 사이즈로 실용성 있게, 그리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내놓을 때 되지 않았나요.” ㄱ씨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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