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를 앞둔 지난달 28일 오전 서울 도봉구 삼성전자서비스센터. 주차장에서 기아 ‘레이’ 차량이 줄을 지어 나왔다. 조회를 마치고 현장으로 나가는 삼성전자 수리기사들이다. 오전 9시부터 쌍문동, 우이동, 도봉동 일대를 다니며 삼성 가전제품을 고친다.
박영환씨(44)는 에어컨 전문 수리기사다. 협력업체인 ‘센터’ 소속 ‘하청 노동자’였으나 곧 삼성전자서비스의 정규직 직원이 된다. 차량 뒤편은 가스통과 용접기, 공구통 등으로 꽉 차 있었다. 박씨 휴대전화 앱을 들여다 보니 한 시간에 한 집 꼴로 수리 예약이 빼곡하게 잡혀있었다. 반드시 두 명이 맡아야 하는 ‘위험’ 작업도 두 건 들어왔다. 조수석에 보조요원 ㄱ씨(25)를 태우고 출발했다.
삼성전자서비스 수리기사 박영환씨(44)가 지난달 28일 고소작업대에 올라 서울 도봉구 쌍문동 한 빌라 5층 외벽에 붙은 에어컨 실외기를 수리하고 있다. |채용민 PD
“이젠 떨어져도 누군가 잡아주겠죠”
첫 작업은 쌍문동 한 빌라 2층에서 시작됐다. 실외기를 고치려면 외벽 철제난간(앵글)을 밟고 올라서야 했다. 안전벨트를 매고, 안방 문에 걸어둔 안전바와 로프로 연결한다. 실외기에 프레온가스를 채워 넣고, 낡은 ‘콘드(실외기의 열교환기)’를 교체하는 데 꼬박 1시간이 걸렸다. 작업이 끝나자 안전장비를 착용한 모습을 휴대전화로 찍어 앱에 올렸다.
콜센터는 에어컨 수리 신청이 접수되면 작업 환경을 확인해 위험도에 따라 ‘안전’, ‘안전주의’, ‘위험’으로 나눈다. 지난해부터 ‘안전주의’ 이상은 보호장구를 꼭 착용하게 하고, ‘위험’ 이상은 혼자서 작업하지 못하도록 규정이 바뀌었다. “전부 두 해 전 그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바뀐 거예요.”
2016년 6월23일, 삼성전자서비스 성북센터 소속 수리기사 진남진씨(당시 42)가 서울 노원구 한 빌라 3층에서 에어컨 실외기를 수리하다가 추락해 숨졌다. 외벽에 붙은 앵글에 매달린 실외기는 진씨가 밟자 무너져내렸다. 안전하게 작업하려면 두 사람이 나가서 함께 작업하고 크레인이 달린 고소작업차(스카이차)를 불러야 했지만, 낮은 기본급을 건당 수수료로 메우는 하청 노동자들은 이런 장치를 할 시간이 없었다.
“저와 똑같은 업무를 하던 분이었어요. 사고 지역이 지금 제가 일하는 도봉센터로 편입됐거든요. 한 번 직접 가 봤어요. 왜 거기서 떨어져 죽을 수 밖에 없었는지…. 진작 둘이서 나갔다면, 시간에 쫓기지 않고 서비스할 조건이 형성됐다면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진씨 사건으로 에어컨 수리기사들의 열악한 작업 환경이 이슈가 됐다. 사고가 날 때마다 “센터가 알아서 할 일”이라며 책임을 피하던 본사는 지난해 안전수칙을 재정비했다. 박씨가 보조요원과 함께 일을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다. “저도 아파트 20층에서 안전장비도 없이 혼자 작업했어요. 위험하다는 걸 왜 몰랐겠어요. 시간에 쫓기잖아요. 이제는 ‘내가 떨어져도 누가 잡아 주겠지’ 싶어서 안심이 되죠.”
“싸우지 않고 얻은 것은 없었다”
박씨가 에어컨을 만지기 시작한 것은 2010년부터다. 워낙 컴퓨터를 좋아해서 혼자서 뜯어보고 고쳐보다가 그 일을 업으로 삼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PC관련 개인사업은 쭉 내리막길이었다. 부품판매도 해보고 쇼핑몰도 열어 봤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다.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에 입사하면서 가전 수리에 입문했다. 동료들에게 물어물어 배워가면서 고생을 하니 3년 째부터는 일이 몸에 붙었다. 서울 도봉구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며 박씨가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성수기인 6~8월에는 오후 9시 전에 퇴근하는 법이 없었다. “10월 무렵부터 이듬해 5월까지는 비수기입니다. 그렇다 보니 여름에 ‘쭉 땡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수당제라 건수를 무조건 많이 채워야 되거든요.” 기본급은 최저임금 수준이었다. 수리 건수가 60건이 넘어야 건당 수수료가 붙는다. 수수료를 어떻게 산정하는지는 협력업체 사장만 안다. 수수료를 월급으로 ‘퉁치자’며 월 220만원만 주는 업체도 있었다.
수리기사들은 삼성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했다. 2013년 7월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박씨는 이듬해 노조에 가입했다. “늘 시키는 대로만 해오다 잘못된 건 잘못됐다 목소리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설립 1년 새 노조 활동을 하다 숨진 ‘열사’가 이미 두 명이었다. 박씨보다 한참 어린 사람들이었다. 2013년 10월 천안센터에서 일하던 4년차 기사 최종범씨(당시 32)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천안센터에 노조가 생기자 삼성 측이 일감을 다른 센터로 빼돌리고 임금을 깎으면서 노조원들을 탄압하던 시점이었다. 이듬해 5월에는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분회장을 맡고 있던 염호석씨(당시 34)가 세상을 등졌다. 노조는 고용노동부에 불법파견 근로감독을 요구했다. 당시 근로감독관들은 ‘불법파견이 맞다’고 결론냈는데, 고용노동부 차관까지 나서서 결론을 뒤집도록 하고 삼성에 ‘출구전략’을 제시한 사실이 최근 드러났다.
▶[정리뉴스]최종범·염호석··· 노동자 죽음으로 이룬 삼성전자서비스 정규직화
박씨도 2015년부터 2017년까지 2년 동안 노조 도봉분회장을 맡았다. 사측의 회유와 협박을 숱하게 겪었다. 동료들과 멀어지고, 조합원이 떨어져 나가고, 협력업체 사장과의 협상에서 ‘밀리는’ 일이 반복됐다. “2014년에 처음으로 노조가 단체협약을 맺었는데, 현장에서는 협력업체의 ‘바지사장’과 처음부터 다시 싸워야 했어요. 본사가 나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되었던 것이죠.”
▶박근혜 정권 노동부는 어떻게 삼성전자서비스 불법파견 결론 뒤집었나
마침내 지난 4월17일 삼성전자서비스가 수리기사 등 협력업체 직원 8000여 명을 직접고용한다고 발표했다. “저희가 좋은 기회를 얻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5년 동안 싸우고 협상하면서 공짜로 얻은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어요. 최종범 열사 돌아가시고 나서야 저희들 타고 다니는 ‘레이’가 지급됐어요. 염호석 열사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사측이 임단협 테이블에 나왔어요. ‘열사’는 절대 다시 나와서는 안 되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싸워야 해요.”
“엔지니어로서 목소리 내고 싶어”
오후 2시. 쌍문동의 또다른 빌라 앞에 박씨가 예약해둔 고소작업차가 도착했다. 크레인이 달린 고층 작업용 차를 기사들은 보통 ‘스카이차’라 부른다. “이제 스카이차는 기사가 판단해서 쓸 수 있어요.” 역시 진씨가 숨진 후 이뤄진 변화다. 이전에는 시간 당 13만원의 사용료를 무상수리 대상이 아닌 경우 고객이 부담하게 했다. 고소작업차를 사용하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 데다 고객에게 부담을 지울 수 없어, 기사들이 외벽에 매달리다시피 해 작업을 했다. 지금은 그 비용을 본사가 치른다.
지은지 4년 된 6층 원룸 빌라에는 창마다 삼성 마크가 찍힌 실외기가 붙어 있었다. 고장난 실외기는 꼭대기층에 매달렸다. 예전 같았으면 창 밖으로 허리를 숙여 나사를 풀고 실외기를 들어올려 작업해야 했을 위치다. 박씨는 장비들을 싣고 고소작업차 작업대에 탔다. 작업대를 외벽에 바짝 붙이고 1시간이 넘도록 고공에서 수리작업을 했다.
“갑시다! 내려가요!” 마침내 작업을 마친 박씨가 아래를 향해 외쳤다. 작업대가 땅에 닿자 박씨가 헬멧을 벗으며 말했다. “찐다, 쪄.” 옷도 머리도 땀에 흠뻑 젖었다. 오후 세 시가 훌쩍 넘었는데 아직 네 집을 더 방문해야 한다. 곧 비가 올 기세였다. 에어컨 수리기사들에게 진짜 ‘전쟁’은 장마 직후부터다. 기온이 확 오르면 집집마다 에어컨을 켜기 시작하고 일감이 쏟아진다. 지난해도 오후 9시가 넘도록 일하는 날이 많았다. 올해는 어떻게 될까.
노조는 지금 삼성전자서비스와 직접고용 세부협상을 하고 있다. 다음 주까지 노사가 막바지 협상에 매달려 7월14일까지 결론을 내는 게 목표다. “제가 에어컨 수리 실력은 누구한테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거든요. 우리 제품에 문제가 있으면 엔지니어로서 ‘개선해 달라’고 당당하게 제조사에 말할 수 있게 됐으면 좋겠어요.” 박씨는 삼성 정직원이 되면 “더 제대로된 서비스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꿈도 이루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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