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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트럼프의 ‘가짜뉴스’ 공격에도 내 할일 묵묵히 할 것” 앤더슨 쿠퍼 CNN 앵커의 ‘기자론’

앤더슨 CNN 앵커가 18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 평화의전당에서 열린 CNH포럼에서 ‘진실을 위한 여정’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다. CNH Studio 제공.

앤더슨 CNN 앵커가 18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 평화의전당에서 열린 CNH포럼에서 ‘진실을 위한 여정’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다. CNH Studio 제공.

“말을 끊어서 죄송합니다, 의원님. 그 소식은 못 들었습니다. 나흘 동안 미시시피 거리에 널려 있는 시신들만 봐야 했거든요.”

2005년 9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즈를 덮쳤을 때다. CNN 기자가 주 상원의원과 인터뷰하던 도중 말을 끊었다. 의원은 정치인과 군대의 도움으로 구조가 잘 이뤄지고 있다고 했지만, 기자가 본 현장은 정반대였다. 거리에 시신들이 떠다녔고, 어느 집 거실에서는 일가족이 익사한 모습을 봤다. 당국은 시신이 있는 집 문에 ‘X’ 표시만 해놓을 뿐이었다. 기자는 “정치인들이 서로 칭찬하고 감사의 말을 주고받는 것을 편안히 듣고 있을 순 없다. 아실지 모르지만 주민들은 몹시 분노하고 절망스러워 한다”고 했다. 이 인터뷰로 시청자들의 머리 속에는 ‘앤더슨 쿠퍼’라는 이름이 각인됐다. CNN의 ‘간판 앵커’가 된 쿠퍼(51)는 지난 18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 평화의전당에서 열린 CNH포럼에서 연사로 참석해 ‘진실을 위한 여정’을 주제로 이야기했다. 한국 방문은 처음이다.

“거실에서 TV 보는 사람들, 러닝머신을 뛰며 뉴스를 보는 사람들을 그곳에서 끌어내 현장에 있는 느낌을 갖도록 하는 것이 내 일입니다.” 쿠퍼는 사실과 더불어 사건이 일어난 장소의 현실, 그곳에서 느끼는 감정을 전하는 것이 언론인의 역할이라고 했다.

그에게도 뜨내기 시절이 있었다. 대학 졸업 후 기자가 되려고 방송국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친구가 만들어준 가짜 기자증과 카메라를 들고 미얀마로 가서 반정부 운동을 취재했다. 몇년 간 르완다, 보스니아, 소말리아의 분쟁 현장에서 프리랜서 경험을 쌓은 뒤 1995년 ABC 기자로 입사해 앵커 자리에 올랐다. 2001년 CNN으로 자리를 옮겨 자신의 이름을 건 뉴스쇼 ‘앤더슨 쿠퍼 360도’를 진행하고 있다.

쿠퍼는 동남아 쓰나미, 아이티 대지진 등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현장으로 날아가는 앵커로 유명하다. 주로 끔찍한 일이 일어난 현장을 취재하다보니 ‘죽음을 알려주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생겼다고 한다. “휴가를 가려고 공항에 앉아있으면 사람들이 저를 보고 ‘뭔가 안 좋은 일이 있구나’라고 생각해요. 호텔 체크인을 할 땐 제게 호텔 예약을 바꿔야 하느냐고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앤더슨 CNN 앵커가 18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 평화의전당에서 열린 CNH포럼에서 ‘진실을 위한 여정’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다. CNH Studio 제공.

앤더슨 CNN 앵커가 18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 평화의전당에서 열린 CNH포럼에서 ‘진실을 위한 여정’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다. CNH Studio 제공.

철도재벌 밴더빌트 가문의 외손자, 예일대 출신이라는 조건에도 지름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성공을 여러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게는 뉴스 리포팅이 그랬다”고 쿠퍼는 말했다. 아버지가 투병하다 일찍 세상을 떠났고, 형은 그가 대학생일 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슬픔에 빠져있을 때면 항상 상실감에 빠진 사람들을 보고 싶었다고 한다. “의사를 만나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만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게 내게는 도움이 됐어요. 이 일이 직업이 됐을 뿐만 아니라 나를 살렸죠.”

쿠퍼가 재난과 분쟁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자신들을 기억해주기를 바라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했다. 쿠퍼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다는 것에 힘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모든 걸 아는 척 하는 건 기자의 덕목이 아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인정하고, 시청자와 똑같은 눈높이에서 사실을 전달해야 합니다. 사실 전달이 중요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죠.”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을 비판하는 CNN을 ‘가짜뉴스’라고 공격하고, “언론은 국민의 적”이라고 비난했다. 러시아 스캔들 특검이 진행될수록 공격의 수위는 높아지고 있다. 쿠퍼는 “자유로운 사회에서 대통령이 언론을 적이라고 공격하는 건 실망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왜 그렇게 하는지는 명백하다. 언론의 특검 보도를 믿지 못하게 하고 물을 흐리려는 것”이라고 했다.

CNN은 특정 정보가 어디서 왔는지 확인하는 별도의 팀을 두고 있다. 쿠퍼는 “정치적인 렌즈로 거르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 사실에 기반한 보도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고 우리는 그에 맞춰가는 것”이라고 했다. “내 일이 가짜뉴스라고 공격받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해왔던 일을 묵묵히 하는 것, 계속 진실을 전달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