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 KBS의 인사를 개인의 역량이나 국민에 대한 봉사의식이 아닌 권력기관이 작성한 리스트에 따라 실행했다면….이건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자괴감이 들고 참담한 심정입니다.”
이명박 정권 때 국정원이 “과거 편파방송에 대한 자성이 없고 좌파 세력을 비호”했다고 평가한 KBS 라디오국 소상윤 PD의 말이다. 언론노조 KBS본부(새노조)는 18일 기자회견을 열어 국정원이 작성한 ‘KBS 조직개편 이후 인적쇄신 추진방안’ 보고서 내용을 일부 공개했다. 보고서는 청와대가 “KBS 조직개편 관련 좌편향 인사 여부를 확인하라”고 지시하자 국정원이 조직개편 전날인 2010년 6월3일 작성한 것이다. 국정원은 보고서에서 “면밀한 인사검증 통해 부적격자를 퇴출해야”한다며 “좌편향 간부는 반드시 퇴출, 좌파세력 재기 음모 분쇄”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국정원은 보고서에 KBS 기자·PD들의 실명과 자체 분석한 정치 성향 등을 담았는데, 이날 기자회견에는 ‘좌편향’으로 낙인찍힌 기자와 PD 3명이 참석했다. 소 PD는 “나름대로 합리적, 상식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해왔던 나까지 리스트에 올렸다”라며 “국정원이 편파방송이라고 본 건 <열린토론>을 지칭하는 듯하다”라고 말했다. 당시 <열린토론> 사회자는 시사평론가 정관용씨였다. 소 PD는 “1라디오국의 대표 프로그램이었고 청취자 반응도 좋았다”라며 “그런 프로그램을 ‘편파적’이라고 몰았고, 마치 ‘반성’까지 해야 하는 것처럼 적었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용태영 전 <취재파일 4321> 부장에 대해서도 “정연주 전 사장 추종하는 인물로 새노조를 비호하고 반정부 왜곡보도에 혈안”이 돼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한명숙 무죄, 4대강에 무슨일이, 봉하마을” 아이템을 다룬 것을 들었다. 기자회견에서 용 전 부장은 “한명숙 1심 무죄 판결, 4대강 감사 관련한 쟁점을 드라이하게 정리한 것이었다”라며 “봉하마을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스케치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보고서가 이런 것들을 ‘반정부 보도’ 사례로 든 것은 비정상적인 수준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용 부장은 <취재파일> 데스크로 부임한 지 6개월도 안 돼 갑자기 다른 보직으로 발령났는데, 그는 “당시에는 ‘평소 국장과 많이 다퉈서 그랬나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 문건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말했다.
KBS 경영진들의 잘못을 지적해 온 내부 조직도 조직개편 과정에서 배제해야 할 “최소한의 기준”으로 제시됐다. 국정원은 이강현 드라마국 EP는 “PD협회장 출신, 여전히 좌편향 PD들과 연계하며 편파방송 꾸밈”, 윤태호 <추적60분> 책임PD는 “사원행동, 불법행위 주도”라고 적었다. 소 PD는 새노조의 전신인 ‘사원행동’ 출신이었다. 소 PD는 “본부노조(새노조)를 좌파로 규정하는 것 같아 어이가 없고 씁쓸했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권이 2008년 축출한 정연주 전 사장 측 인사들을 추적관리한 정황도 담겼다. 보고서에는 “정연주 추종인물인 김영신 이상요 ‘무관용 원칙’”이라고 적혀 있다. 이상요 전 PD는 “보직간부들이 나를 ‘정연주 오른팔’이라며, KBS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만든 것 같은 단어로 여러 번 지칭했다”라고 말했다. 이같은 ‘꼬리표’가 붙은 이유로 그는 참여정부 시절부터 <인물현대사> 등 프로그램을 맡으면서 함석헌 신부, 전태일 같은 민감한 소재를 다룬 것을 들었다. 이 전 PD는 “이런 평가가 축적이 돼 정권이 바뀐 뒤 ‘무관용 배제 원칙’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다”라고 말했다. 이 전 PD는
국정원은 좌편향 인사 외에도, 이명박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은 사람들을 ‘무능·무소신’으로 평가했다. 임창건 당시 보도국장은 “편파방송 탈색 주력했지만 보도책임자 자질 미흡”이라며 그 근거로 “천안함 사건, 노무현 1주기” 때 “수동적인 업무자세”를 보였다고 평가했다. 부사장과 본부장 인사를 두고 “김인규 사장과 협의해 처리”한다는 등, 국정원이 고위간부 인사에 관여한 듯한 정황도 드러났다. 김인규 전 사장 최측근 간부 5인에 대해서는 ‘특별 관리’가 필요하다고 언급한 내용도 있다.
KBS 새노조는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은 이동관씨였고, 공영방송 장악이 이명박 정부 최대 관심사였던 만큼 대통령도 보고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론된다”며 “또 사찰 수준에 가까운 이 보고서는 구체적 내용을 보면 KBS내부 협조자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동관 전 홍보수석은 국정원 보고서와 관련해 “지시한 적도 보고받은 적도 없다”고 새노조 측에 밝혀온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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