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 자매 동시 전교 1등’으로 시험지 유출 의혹을 받고 있는 서울 강남의 숙명여고를 경찰이 5일 압수수색했다. 서울시교육청이 특별감사 후 물증을 확인할 수 없다며 수사를 의뢰한 데 따른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학부모들의 공분은 해당 학교를 넘어 현재는 ‘내신농단사태’로까지 규정돼 공교육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서울 수서경찰서는 이날 오전 10시부터 이 학교 교장실과 교무실 등을 압수수색했다. 경찰은 수사관 15명을 투입해 정기고사 문제와 정답 유출 의혹 관련 자료를 찾았다. 오후엔 교무부장 자택도 압수수색했다. 이는 지난달 31일 시교육청으로부터 감사 자료를 넘겨 받아 경찰이 수사에 착수한 지 5일 만이다.
■ 분노에 기름 부은 학교 측 ‘해명’
최초 국민청원 게시판을 통해 세간에 알려진 이 사건은 교육청 감사 및 해당 학교의 해명 등이 거듭되면서 사회적 파장이 더욱 커지고 있다. 이 학교에서는 지난달 교무부장인 ㄱ씨가 2학년에 다니는 쌍둥이 딸 2명에게 시험문제를 유출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서울시교육청이 특별감사를 실시했다. ㄱ씨의 두 딸은 1학년인 지난해 각각 59등, 121등에 불과했지만 2학년 1학기에는 문이과 전교 1등을 차지했다. 교육청은 정기고사 문제를 관리하는 고사담당 교사가 수업 등으로 자리를 비운 경우 ㄱ씨가 단독으로 시험지를 검토·결재했다며 문제 유출 개연성이 있다고 봤다. 해당 여고 측은 이같은 감사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재심의를 요청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학교 측은 “ㄱ씨가 일하는 교무실은 교사 40여명이 함께 이용한다. ㄱ씨가 단독으로 시험지를 결재·검토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또 자매는 흔히 말하는 ‘내신스타일’로 열심히 공부했으며 음악·미술·체육 등 다른 학생들이 등한시하는 과목에서 점수가 높았다는 해명도 내놓았다.
이런 설명은 학부모들의 분노만 키웠다. 강남의 한 학부모는 “예체능을 잘해서 전교 1등이 됐다는 건 말이 안된다. 이 지역에선 내신경쟁이 워낙 치열해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도 예체능 과목을 소흘히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학부모들은 지난달 30일부터 매일 저녁 8시 이 학교 정문앞에서 ‘내신비리 아웃’ ‘숙명여고 내신농단사태 규탄’이라고 적은 팻말을 들고 촛불집회를 하고 있다. 집회 소식이 알려지면서 인근 중고교 학부모들까지 가세하고 있으며, 인터넷 ‘맘카페’를 중심으로 그들을 응원하는 학부모들도 늘고 있다.
■ ‘정시확대’ 여론에 힘 실릴까…“성적지상주의가 근본문제”
이 사건은 특히 대학입시에서 수시모집의 주요 전형인 ‘학종’(학생부종합전형) 불신에 기름을 부었다. 내신 경쟁이 치열한 특목고와 강남 지역 학부모들은 내신을 기준으로 뽑는 학생부교과전형이나 교사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큰 학종은 “공정치 못한 게임”이라며 정시 확대를 강하게 요구해왔다. 교육부도 이런 여론에 밀려 지난달 2022학년도 대입제도개편안을 발표하면서 대학들에게 수능 위주로만 신입생을 뽑는 정시 전형을 30% 이상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
시험지 유출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수능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힘을 받을 수 있다. 조상식 동국대 교수는 “정유라 사태 이후 입시공정성은 우리 국민에게 최고의 가치 덕목이 됐다”며 “진학을 위해선 어떤 방법도 가능하다는 나쁜 관행들이 있고 그에 대한 불신이 (이번 사건으로) 터진 것”이라고 말했다. 조 교수는 “대중들은 학력고사 이전 담론과 기준을 가지고 공정성 측면에서 수능이 맞다고 하는데 그것도 꼭 정답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최은순 회장도 “대학서열화로 인한 성적지상주의가 주요 원인”이라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정시를 확대해도 이런 문제는 또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시 교육청은 경찰 수사 결과를 지켜보면서 향후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교육청 관계자는 “경찰 수사가 시험지 유출로 결론이 난다면 해당 교사는 파면이나 해임될 것으로 보이고 자녀들에 대해선 학교 규칙에 따라 징계절차가 진행될 것”이라며 “이와 별도로 해당 학교가 감사 재심의를 요청한 부분에 대해선 내부 검토를 거쳐 수용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숙명여고는 이날 자료를 내 “학교법인이 ㄱ씨 등 4명에 대한 징계절차에 착수했다. 수사 결과가 나오면 그 결과를 반영해 최종 징계처분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숙명여고 의혹 계기로 봇물터진 전수조사 여론...이도저도 못하는 교육부
서울 숙명여고 시험지 유출 의혹의 파장이 대입 제도에 대한 총체적 불신으로 번졌다. 고교 내신에 대한 불신은 물론이고, 대입 전형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학생부종합전형(학종) 폐지론과 함께 고교 내신비리 ‘전수조사’를 벌이라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정작 교육부는 교직원과 자녀가 같은 학교에 재학하는 걸 막는 ‘상피제’ 외에는 신뢰를 회복할 이렇다할 조치를 내놓지 않고 있다. 경찰조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전수조사는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강남 학원 정보사이트인 ‘디스쿨’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6일까지 전국 학교의 내신비리를 전수조사하고 ‘정시’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 줄을 이었다. “강남 유명 사립고이기에 물위로 터져나온 것일 뿐, 전국을 조사해보면 이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것” “교사인 학부모가 시험 전에 시험지와 답안지를 검토해도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이상한 제도” “이런 상황에서 학종을 늘리자는 교육부의 의도가 의심스럽다” “학종이 확대된 최근 3년 새 교사 자녀 대입결과 및 고교 성적을 전수조사하라” “전국단위 자사고나 특목고도 (조사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교육부는 아직도 입장발표가 없나”라는 비판도 많았다. 해당 학교 앞 촛불집회까지 열리면서, ‘제2의 정유라 사태’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숙명여고 1학년 학부모 ㄱ씨는 전화인터뷰에서 “교사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성적을) 고칠 수 있는 상황에선 내신으로 대학 가는 대입제도가 문제”라며 “아이들이 전국 단위의 객관적인 시험을 치러 대학에 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당장 이달 수시 모집을 앞둔 이 학교 고3 학부모들은 학교 내신 관리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대입 전형에서 이 학교 출신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교육부는 특정 학교의 내신 비리 의혹이 학종 불신으로 이어져 ‘정시확대’ 프레임이 커지는 것에 곤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교육부는 학종 등 수시 확대로 방향을 잡았다가 이미 한 차례 여론에 떠밀려 ‘공론화’ 끝에 ‘정시 30% 유도’라는 방안을 내놨다. 학종 부작용에 대한 비판을 의식해 지난달 학생부 개선방안도 발표했다. 하지만 학생부 개선안이 자기소개서를 간소화하고 수상기록을 줄이는 식으로 손보는 데에 그쳤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는데, 숙명여고 사건이 터진 꼴이다.
지난 7월 광주 고교에서 시험지 유출 사건이 났을 때 교육부는 시험지 보관장소에 CCTV를 설치하는 등 관리를 강화하겠다는 대책을 내놨고, 숙명여고 사건 뒤에는 교원과 자녀가 한 학교에 다니지 못하도록 하는 ‘상피제’를 발표하는 데 그쳤다. 교육부는 전수조사 같은 추가 대책을 내놓기는 이르다는 입장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전수조사는 시도교육청 권한”이라면서 “협조요청을 할 수는 있지만 향후 추이를 봐가며 추가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사립학교 교원이 시험지 유출이나 성적 조작 등의 비리를 저질렀을 때 국공립 교원 수준의 징계를 받도록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박미경 의원은 지난달 30일 사립학교 교원이 학생평가 비위를 저지를 경우 국공립 교원과 동일한 수준의 징계를 받도록 한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박 의원 측은 “사립학교의 경우 학교 법인의 임의적인 징계가 우려돼 개정안을 발의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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