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본부 “고등교육 개혁, 국가 책무 강화·재정 확대 전제”
법안 3개 발의…유은혜 장관 후보자도 이름 올려 입법 주목
‘등골 빼먹는’ 등록금 부담을 줄이고 대학교육의 공공성과 질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거론돼온 ‘대학 교부금’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교육부가 지금처럼 매년 예산을 새로 편성해 재정지원금을 내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초·중등교육처럼 법으로 교부금을 만들어 대학 지원을 ‘제도화’하라는 것이다. 특히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로 내정된 유은혜 의원이 이 법의 도입을 지지해왔기 때문에 그간 지지부진했던 입법 과정에도 변화가 생길지 주목된다.
지난 5일 대학 교수와 교직원, 학생, 학부모 단체들은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가칭) 등록금부담완화와 대학혁신을 위한 고등교육재정교부금법제정 청원운동본부’를 출범시켰다. 참여단체는 공영형사립대학추진위원회, 대학노동조합정책연대,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전국교수노동조합,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국대학노동조합,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학술단체협의회 등 12개다. 그동안 대학 교부금은 주로 한국대학교육협의회나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등 총장 중심 협의체에서 주장해왔는데 이번엔 대학 노조들과 교수단체, 학부모들까지 나섰다.
대학교부금법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는 2004년 17대 국회 때부터 나왔다. 한국 대학들은 사립대가 80% 넘고, 재정 운영에서 등록금 의존도가 매우 높다. 국립대조차 40% 이상을 등록금에 의존한다. 심한 경우 연간 1000만원에 육박할 정도로 등록금이 치솟자 정부는 학생과 학부모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입학금·등록금을 낮추거나 동결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등록금 동결에 학령인구마저 줄어 재정이 악화되자 대학들은 ‘교육은 국가의 책무’라며 교부금법 제정 운동에 다시 나섰다.
특히 정부가 재정 확충 없이 구조조정을 압박하다보니 인문학과 기초과학 등 학문 기반이 무너지고 교직원 ‘비정규직화’가 심해진 데다 수도권과 지방대학 간 격차가 더 심해져 교육환경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청원운동본부는 “대학 정원만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성을 강화하고 고등교육을 올바로 개혁하려면 고등교육 재정 확대를 전제로 국가가 책무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우리나라 고등교육의 1인당 교육비는 9323달러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만5772달러의 60% 수준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초·중등 교육과정 예산과의 형평성을 들기도 한다. 초·중등 교육과정은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에 따라 예산을 배정하는 데 반해 고등교육은 관련 법이 없어 매년 예산을 정부가 재편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부의 내년 예산에서 유·초·중등 분야는 내국세 증가에 따라 6조원가량 늘어났지만, 별도 편성하는 고등교육 예산은 4550억원 늘어나는 데 그쳤다.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고등교육재정교부금법안은 3가지로 2016년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2017년 윤소하 정의당 의원, 안민석 민주당 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했다. 유은혜 후보자는 안민석 의원 법안에 이름을 같이 올렸다. 세 법안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내국세의 일정 비율을 교부금 재원으로 마련해 일정한 원칙에 따라 각 대학에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고등교육에 대한 공공부문 투자 규모가 2013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0.7% 수준으로 OECD 평균인 1.1%에 못 미친다며 법제화를 통해 GDP 대비 평균 수준 이상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고등교육재정교부금법이 부실화된 대학들을 살리고 교육의 질을 높이는 해법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 대학교육이 초·중등교육처럼 공공성을 띠는지, 특히 사립대학을 공공재로 볼 수 있는지는 논란거리다. 사학비리가 만연한 국내 현실에서 사립대 재정회계를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구조가 없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교육부도 원칙적으로 대학 재정지원을 늘리는 것에는 공감하면서도 “정부 재정이나 사회적 합의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임재홍 방송대 교수는 “정부가 국내 고등교육 투자를 게을리하다 보니 연구 중심 대학이 사실상 없어 석·박사 공부를 하려면 외국에 나가야 한다”며 “4차 산업혁명의 변화 속에서 세계가 대학 지원을 늘리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다만 국공립대와 달리 정부가 사립대에 대해선 아직까지 재정을 통제할 수단이 없으니 이에 대한 해법을 마련하고, 대학 구성원들이 민주적으로 대학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된 후에 관련 법이 만들어져야 효과를 볼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국대학노조 김병국 정책실장은 “오랜 기간 시민단체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여론을 만들어온 끝에 ‘반값 등록금’ 정책이 마련됐듯이, 교부금법 제정에 대해서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운동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공영형 사립대’ 내년도 예산안 ‘0원’…시작도 전에 삐걱
노도현 기자
자금 지원 ‘공익 이사’ 참여…경쟁력 제고·서열화 해소 역할
‘국정과제’ 교육부 812억 책정 요청에 기재부 “좀 더 검토를”
‘고등교육의 질 제고’는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과제 중 52번 과제다. 거점국립대와 지역강소대학을 집중 육성해 대학의 공공성과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게 요지다. 그 일환으로 2019년부터 공영형 사립대학을 단계적으로 육성하기로 했다. 하지만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서 공영형 사립대를 추진하기 위한 예산은 ‘0원’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위기를 맞은 셈이다.
교육부는 공영형 사립대 시범사업 명목으로 신규 예산 812억원을 책정해달라고 기획재정부에 요청했다. 일반대 3곳과 전문대 2곳을 공영형 사립대로 우선 선정하고 각 대학에 100억~200억원가량 투입할 계획이었다. 교육전문가들에게 연구과제를 발주해 정책목표와 추진일정을 세우며 예산을 확보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봤다.
공영형 사립대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발전 의지와 가능성이 있는 사립대의 핵심 운영경비를 지원하는 대신 이사회에 ‘공익이사’를 참여시켜 투명한 운영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대학분류체계 중 하나인 ‘정부의존형 사립대학’을 한국 실정에 맞게 만들었다. 경비를 50% 지원하고 이사회 절반을 공익이사로 채우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예산에 따라 비율은 달라질 수 있다. 공공성을 높이기 위해 공익이사를 두되 정부가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국공립대학과 다르다. 궁극적으로 지역 사립대의 경쟁력을 키워 대학 서열을 해소하고 바람직한 대학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교육부의 계획은 기재부에서 가로막혔다. 기재부는 사업이 정교하지 못하다며 예산을 편성하지 않았다. 기재부 관계자는 “국립대와 사립대의 역할, 대학구조조정 방향 등을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며 “사업방향 자체에 반대했다기보다 사회적 공론화 과정이 좀 더 남았다는 판단하에 예산을 반영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교육부는 공영형 사립대가 국정과제인 만큼 국회 예산 심의 과정에서 예산이 반영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입장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두 부처의 관점이 다른 것 같다. 저희 나름대로 사업 예산 확보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국가가 왜 사립대를 지원해야 하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국 대학 86.5%가 사립이다. 이 중 상당수가 사학비리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개선될 여지가 큰 지역 사립대를 공영형으로 전환하고, 거점국립대와 함께 지역 대표 대학으로 키우겠다는 것이 공영형 사립대다. 학령인구가 줄어 지역 사립대가 재정위기를 겪고 있다는 점도 필요성을 뒷받침한다. 이미 상지대, 영남대 등 12개 대학은 발벗고 나서 전국공영형사립대추진협의회를 구성했다.
아무리 취지가 좋아도 예산이 없으면 도루묵이다. 교수노동조합을 비롯한 11개 시민사회단체는 지난달 28일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철학은 정책과 예산을 통해 드러나는 법이다. 재정적 뒷받침이 없는 고등교육 체제개편은 허사”라고 비판했다. 김명연 상지대 교수는 “대통령 공약인 공영형 사립대 예산을 기재부가 전액 삭감한 것은 정부의 고등교육 혁신의지를 의심하게 만든다”며 “100% 동의를 얻는 개혁은 없다. 청와대가 장기적인 고등교육 정책 구상을 제시하면서 부처와 대학, 국민을 적극적으로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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