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범 기자 ksb1231@kyunghyang.com
“회사는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직급, 호봉, 근속연수를 비롯한 근속에 따른 권리를 모두 인정한다. 법원 판결에 의한 ‘직접고용일’을 최초 (정규직)입사일로 본다.”
한국의 대표적인 시멘트회사인 ‘삼표시멘트’ 노사가 지난 18일 내놓은 잠정 합의안입니다. 삼표시멘트(옛 동양시멘트)는 지난 3년간 불법파견 논란과 대량해고에 따른 법정 다툼으로 몸살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하지만 회사가 불법파견 잘못을 인정하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함으로써, 부당함을 호소하며 광화문 거리에서 한뎃잠을 자던 노동자 39명은 해고 934일 만에 일터로 돌아가게 됐습니다.
지난해 7월 최창동 민주노총 동양시멘트지부장이 동양세민트 부당해고, 불법파견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노동계는 삼표시멘트 노사 합의를 “불법파견이 만연한 제조업계에서 ‘온전한 정규직 전환’을 인정받은 이례적인 케이스”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만큼 불법파견 비정규직이 현행법에 따라 ‘마땅히 받았어야 할’ 정규직 대우를 인정받는 게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렵다는 말입니다.
도급이라 해놓고 실제론 불법파견
왜 이런 말이 나오는지 알려면, 먼저 제조업에 관행처럼 퍼져 있는 불법파견 실태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제조업 대기업들은 하도급업체에 일감을 도급 형태로 넘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장 바깥에서 일감을 처리하는 사외하청도 있고, 아예 공장 안에 상주하며 일하는 사내하청도 있습니다.
문제는 도급과 파견의 구분이 애매하다는 겁니다. 도급은 민법 상의 개념입니다. 해당 업무를 수행할 능력을 적절히 갖춘 업체가 원청에서 수주한 일감을 독자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파견은 말 그대로 원청에 필요한 인력을 대주는 겁니다. 현행 파견법은 제조업 생산공정에는 인력을 파견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원청과 도급계약을 한 사내하청 업체가 업무수행 능력도 없이 단지 ‘인력 장사’만 하면 ‘불법 파견’이 됩니다.
이런 고용구조는 시멘트 업계뿐 아니라 자동차, 철강, 조선, 비료 등 제조업 전반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노동계에서는 “기업들이 사람 쓰는 비용을 줄이면서 파견법 규제도 피하려기 위해 고용관계를 도급으로 위장하는 것”이라고 숱하게 지적해 왔습니다.
지난 4월 ‘정리해고 철폐, 비정규직 철폐,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며 서울 광화문 사거리의 한 광고탑에서 노동자 6명이 고공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 가운데에는 동양시멘트 노조 김경래 수석부지부장도 포함돼 있었다. | 정지윤기자
‘위장도급’ 상태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상황은 어떨까요. 원청의 지휘·감독을 받으며 정규직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지만 임금이나 노동조건은 다릅니다. “오른쪽 바퀴는 정규직, 왼쪽 바퀴는 비정규직이 끼운다”는 말이 나온 배경입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도 어긋납니다.
2000년대 이후 사내하청 문제가 이슈가 됐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조를 세워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섭니다. 삼표시멘트도 비슷한 경우였습니다. 동양시멘트 시절 수십년간 하청업체 ‘동일’과 ‘두성’을 통해 노동자들을 부려왔습니다. 원청 직원과 같은 일을 시키면서도 임금과 복지에서는 차별했습니다.
2015년 2월 고용노동부는 동일·두성 노동자들과 동양시멘트 사이에 ‘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인정된다며, 원청이 직접 고용하라고 지시합니다. 하지만 회사는 하청업체와 맺은 형식적인 도급계약을 해지해 노동자 100여명을 공장에서 몰아내는 것으로 응수합니다.
법원·노동위 판결 나와도 회사는 ‘요지부동’
노동자들은 반발했습니다. 정부가 ‘원청과 하청노동자 사이 근로관계가 인정된다’는 결론을 내린 만큼, 동양시멘트도 자신들을 정규직으로 대우해야 하고, 따라서 해고는 부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노조는 그 해 8월부터 서울 광화문 삼표 본사 앞에서 노숙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12월 서울중앙지법도 노동자들이 낸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불법파견이 맞다”고 판결했습니다. 중앙노동위원회도 부당해고를 인정했습니다.
그런데도 회사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불법파견 형태로 싼값에 노동력을 써온 사실을 인정하면 모든 하청 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해야 하는 부담이 생깁니다. 파견법은 2년 이상 일한 노동자는 원청이 직접 고용한 것으로 간주하거나(고용의제), 직접고용 의무가 발생한다(고용의무)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노조가 회사를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하는 일조차 만만치 않았습니다. 노조 부위원장이 광화문 광고탑에서 고공농성을 했고, 청와대 앞에도 노숙 텐트를 세웠습니다. 이런 압박이 통했는지, 노사는 올해 7월부터 교섭을 재개했습니다. 대화가 끊긴 지 20개월만이었습니다.
2015년 2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원들이 근로자 지위 확인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승소한 뒤 대법원을 나와 축하인사를 나누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그후 실무교섭 네 차례와 본교섭 세 차례를 벌이며 합의안을 이끌어냈습니다. 하청 신분으로 2년 이상 일한 노동자들의 근속·호봉·직급을 모두 인정하고 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임금 차액도 지급하며, 원래 일했던 공정으로 고스란히 복귀시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다른 업계에도 영향 미치길”
이는 다른 기업들이 불법파견에 대해 보여온 태도와는 사뭇 다릅니다. 법원 판결문을 들이대도 회사가 “승소한 당사자만 해당하는 일”이라며 선별 채용을 하거나, 이른바 ‘중규직’으로 불리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주는 데에 그치는 게 대다수입니다.
현대차그룹의 경우, 2010년 대법원이 사내하청 노동자 최병승씨를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지난 2월 서울고법도 현대·기아차 하청노동자 600여명이 낸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노동자들 손을 들어줬습니다. 하지만 현대·기아차의 조치는 판결문의 내용에 못 미칩니다.
현대차 노사는 올해까지 사내하청 노동자 6000명을 정규직으로 ‘신규채용’하기로 합의한 상태입니다. 법원 판결 취지대로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게 아닌 특별채용 형태입니다. 근속은 하청업체 근무기간에 따라 일정 수준까지만 인정하고, 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임금차액 즉 체불임금도 일부만 줍니다. “현대차에 불법파견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노사가 특별채용을 합의하는 과정에서 교섭 주도권을 쥔 정규직 노조와 하청업체 노동자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삼표시멘트에도 남은 과제는 많습니다. 900일이 넘게 싸우면서 몇몇 노조원이 구속되고 사측 손배가압류로 고통받는 등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불법파견 투쟁을 노조의 ‘떼쓰기’ 정도로 여기는 일각의 시선도 극복해야 할 벽입니다.
그렇지만 노동계는 이번 합의가 불법파견 비율이 50%에 달하는 시멘트업계를 넘어 제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재형 민주노총 삼표시멘트지부장의 말입니다. “우리가 900일 넘게 싸운 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법에 따라 응당 받아야 할 권리를 인정하고 더 이상 불법을 저지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인 업계의 고용관행에 모두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이번 합의의 성과가 다른 업계로도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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