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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고 돈 벌기

정규직 아닌 자회사 직원으로 전환 ‘꼼수’…되레 해고 위기 몰린 공공기관 비정규직

문 정부 ‘국정과제 1호’ 불구 물거품되어 가는 ‘정규직의 꿈’
한국잡월드 직업 체험 강사 160명…자회사 채용 거부, 직접고용 촉구
비용 줄이려는 기관과 갈등 격화
남양주종합촬영소·한국마사회 등 전환 논의 지연, 계약만료 실직도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사랑채 앞 광장에서 한국잡월드 소속 비정규직 강사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자회사 소속의 정규직 전환이 아닌 원청회사의 직접고용을 촉구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사랑채 앞 광장에서 한국잡월드 소속 비정규직 강사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자회사 소속의 정규직 전환이 아닌 원청회사의 직접고용을 촉구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문재인 정부가 ‘국정과제 1호’로 공공기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만들겠다고 했지만, 이 때문에 몇몇 기관에서 비정규직들이 도리어 올 연말 대량 해고당할 위기에 몰렸다. 비정규직들을 직접 정규직으로 고용하는 대신 ‘자회사 직원’으로 채용해 비용을 줄이려는 기관들과 노동자들이 부딪치면서 극한 갈등이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 산하 직업교육기관인 한국잡월드에서는 직업체험강사 중 자회사 방식 전환을 거부하고 있는 160여명이 올해 말 해고될 위기에 놓였다. 한국잡월드가 최근 용역·파견 형태로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을 고용하기 위해 자회사를 만들고 “전환채용에 응시하지 않으면 계약이 끝난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잡월드는 자회사 설립등기와 사업자등록을 마쳤고, 10월 말 기존 용역사와의 계약이 끝나는 시설경비·청소미화 등 5개 직종 59명에 대해 이미 전환채용 공고를 냈다. 이들은 서류심사와 면접, 신체검사를 거쳐 다음달 1일 자회사에 채용된다. 전시체험강사 275명과 고객센터·전산직 14명은 다음달부터 전환채용 절차가 시작된다.

■ ‘자회사 고용’ 갈등으로 해고 위기

하지만 비정규직 대부분을 차지하는 강사들은 자회사로 가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잡월드는 지난 4월 노·사·전문가협의회(노사전협의회)를 통해 ‘자회사 채용’을 결정했다. 강사들은 전체 전환대상 노동자의 3분의 2를 차지하는데도 지난해 말까지 진행된 1~3차 협의회에 아예 들어가지도 못했다. 4차 회의부터 참여했지만 이미 분위기가 ‘자회사 방식 전환’으로 정해진 뒤였다. 자회사로 소속이 바뀌면 당장 고용은 안정되지만 ‘용역업체 소속 비정규직’이라는 신분은 그대로다. 본사와 소통하지 못해 생기는 안전 문제, 업무의 질 같은 문제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노조는 직업체험교육이라는 핵심 업무를 맡은 강사들을 공공기관이 직접 관리하는 게 맞다고 주장한다.

강사들이 지난 4월1일 뒤늦게 노조를 결성했지만 이틀 뒤 노사전협의회는 노조 주장을 묵살하고 자회사 설립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용역업체 계약기간이 올해 말 끝나기 때문에 강사들은 11월 전환채용에 응시하지 않으면 내년에 모두 일자리를 잃는다. 노조에 가입해 천막투쟁과 파업을 벌이고 있는 160여명 전원이 해고 위기에 몰린 것이다.

잡월드는 정상적 절차를 거쳐 자회사 설립 절차를 시작한 만큼 번복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잡월드 관계자는 “계약이 만료되는 이들에게 전환채용에 응시하라고 공고했으며 응하지 않는 것은 본인의 선택”이라면서 “우리 규모로는 자회사 설립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고 직접고용은 어렵다”고 말했다. 노조는 정규직 전환 협의 과정에 문제가 있다면 다시 논의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하는 등 구제방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 절차 지연 고용연장 못하고 ‘계약 만료’

정규직 전환 결정이 늦어지면서 그 사이에 계약이 끝난 비정규직들이 나가야 하는 곳도 있다.

경북 김천시청 통합관제센터에서 폐쇄회로(CC)TV를 감시하며 방범과 재해예방 업무를 하는 비정규직 20여명은 지난 5월 계약 만료로 일터를 떠났다. 다음달에도 3명의 계약기간이 끝난다. 지방선거 일정 등으로 정규직 전환 심의가 차일피일 미뤄진 탓에 방침대로라면 정규직이 됐어야 할 사람들이 해고되는 것이다. 노조는 최소한 정규직 전환 심의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계약을 연장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전환을 논의하지 않은 채 사업을 접은 경우도 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운영하는 경기 남양주종합촬영소에는 10년 넘게 일한 사람들을 포함해 비정규직 직원 26명이 일하고 있다. 내년에 영진위가 민간기업인 부영에 시설을 팔기로 했기 때문에 내년 7~8월 용역계약이 끝나는 비정규직들은 그 이후로는 갈 곳이 없어진다. 권영필 남양주종합촬영소 비정규직노조 분회장은 “회사는 전환배치 같은 대안을 한번도 내놓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마사회에서도 지난해 문화센터 관리업무를 맡아온 운영매니저 7명이 2년 계약기간이 끝나 일터를 떠났다. 노조가 고용 유지 방안을 만들고 정규직 전환을 논의해달라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계약기간이 끝나지 않은 매니저들은 최근 마사회가 직접고용하는 것으로 결정됐으니, 앞서 밀려난 사람들은 정규직 전환의 문턱에서 일자리를 잃은 셈이다.

한국잡월드 비정규직 강사 노조의 박영희 분회장은 “대통령이 상시지속 업무를 하는 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해 좋은 일자리를 만들라고 했는데도 기관의 목적사업을 수행하는 노동자들조차 고용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지속되고 있다”며 “파국을 막으려면 기관과 정부가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사실상 기관의 자율에 맡겨…생명·안전 업무도 직접고용 꺼려

‘공공기관 정규직화’ 모호한 가이드라인이 혼란 자초

기존 정규직의 반발·비용 우려
정규직으로 전환된 파견·용역
절반 이상이 자회사 소속 방식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 이후 일부 기관에서 오히려 파열음이 나오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정부 정책에 맞춰 비정규직은 정규직 전환을 기대하고 있는 반면 정규직은 이를 불편하게 받아들이고, 기관 입장에선 정규직화에 수반되는 비용을 우려하는 등 3자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혔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부는 기준을 만들기 어렵다는 이유로 모호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놓고 “기관이 자율적으로 정규직화 방식을 결정하라”고 방치해 갈등을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표적인 게 자회사 문제다. 지난해 7월 나온 ‘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기간제 노동자는 기관이 직접고용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 하지만 파견·용역 노동자는 자회사를 만들어 그 회사의 정규직으로 채용해도 정규직 전환으로 인정해준다.

가이드라인을 만들 때 노동계에서는 자회사 전환 방식을 사용할 수 있는 사유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부는 “가이드라인을 만들기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다. 결국 정규직 전환 방식을 선택하느냐는 각 공공기관이 노·사·전문가협의체를 통해 자율적으로 결정할 몫으로 남았다.

자회사 방식은 처우개선에 써야 할 예산이 자회사 운영에 들어가고 간접고용 때문에 생기는 폐해도 그대로 남아 노동자들에게 불리하다. 고용의 질을 끌어올려 공공서비스의 질을 높이겠다는 정책 목표와도 맞지 않는다. 하지만 공공기관들은 용역업체 노동자를 대거 직접고용해야 한다는 부담을 떨칠 수 있어 자회사 방식을 선호한다. 정규직들의 반발도 잠재울 수 있다.

이 때문에 많은 기관이 자회사 방식을 선택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용득 의원이 집계한 자료를 보면 공기업과 준정부기관 334곳 중 원청이 아닌 자회사 소속으로 전환된 정규직은 33개 기관 3만2614명으로 나타났다. 파견·용역 비정규직 중 정규직이 된 5만9470명의 54.7%에 달한다. 지방공기업 149곳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파견·용역 비정규직 1674명 중에서도 41%인 640명(4곳)이 자회사 소속이다.

노동자들은 정규직 전환 방식을 논의해야 할 협의체에서 회사가 자회사 방식을 택하자고 분위기를 몰아가는 경우가 많다고 증언한다. 김현준 공공운수노조 한국마사회지부장은 “협의체에서 회사가 ‘직접고용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생명·안전과 관련된 업무는 직접고용한다’고 명시돼 있지만, 정작 생명·안전 업무가 무엇인지는 정하지 않은 정부의 태도도 혼란을 자초했다. 가이드라인에는 “생명·안전 업무의 판단기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범위는 기관에서 정한다”고 돼 있다. 이로 인해 법원 판례 등에 생명·안전 관련 업무라는 게 명시돼 있는 직종도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누락되는 일이 벌어졌다.

화력발전소에서 운전·정비 업무를 하는 용역·위탁 비정규직들이 이런 경우다. 이들의 업무는 국민의 생명·안전과 직결돼 있어 파업권도 제한되는 ‘필수유지업무’다. 생명·안전과 관련 있는 업무라는 것은 각급 노동위원회의 결정, 법원 판례도 쌓여 있다. 그럼에도 화력발전 5사는 “필수유지업무지만 생명·안전업무는 아니다”라며 아직까지 직접고용 논의를 시작하지 않았다. 박준선 공공운수노조 조직국장은 “지도감독을 요구해도 노동부는 각 기관에서 알아서 할 일이라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가이드라인을 만들 때부터 고민했지만 자회사 설립의 기준이나 생명·안전업무의 기준을 일괄적으로 정하기가 어렵고, 무리하게 정하면 논란이 일 수 있어 현장에서 정하도록 했다”며 “바람직한 자회사 모델 등에 대해 협의 중이지만 추가로 설립 기준을 제시할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