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장애는 일반인의 12배, 우울증은 3.5배, 하지정맥류는 25.5배, 방광염은 3.2배. 밝은 조명 아래서 누가 봐도 멋진 명품 화장품을 파는 노동자들은 각종 질병에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시달렸고, 때론 마음의 병도 앓았다.
국내 최초로 백화점·면세점에서 화장품을 파는 판매직 노동자들의 노동환경과 건강상태에 대한 실태조사가 이뤄졌다.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 김승섭 교수 연구팀은 올해 1월부터 10개월 가까이 백화점·면세점의 화장품 판매점에서 일하는 노동자 2806명을 설문조사해 결과를 분석해 17일 공개했다. 김 교수 연구팀은 이날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용득 의원실, 전국서비스산업노동조합과 함께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설문 대상자 대부분(96.5%)이 여성이며, 60%는 5년 이상 화장품 매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딱딱한 구두를 신고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채로 매일 10~12시간씩 일했다. 매장 안에 의자가 있어도 이용하지 못하게 한 백화점 지침 때문에 앉지 못했고, 휴게실은 너무 멀고 좁아 비상계단 옆 바닥에서 눈치보며 쉬었다. 매장을 봐줄 사람이 없어 화장실에도 마음대로 가지 못했다. 고객들이 폭언을 해도 본사 관리직 눈밖에 날까봐 웃으며 참고 넘겨야 했다.
이런 근무환경은 고스란히 질병이 됐다. 비슷한 나이의 여성 평균보다 높은 질병 현황이 수치로 드러났다. 화장품 판매직 노동자들의 근골격계 질환 발병율은 평균적인 20~49세 여성(건강보험공단데이터 기준)보다 훨씬 높았다. 하지정맥류는 25배, 족저근막염은 15.8배, 무지외반증은 67배였다. 줄곧 서서 일하는 환경은 특히 임신한 여성들에게 좋지 않았다. 전체의 11.4%인 160명이 “화장품 매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뒤 유산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절반 가량인 49.8%가 “동료의 유산 경험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고객과 본사 양쪽에서 당하는 ‘갑질’은 마음의 병을 키웠다. 응답자의 6.1%인 172명은 “지난해 우울증으로 진단이나 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공황장애를 겪었다는 사람도 2.4%였다. 평균적인 20~49세 여성들에 비해 3.5배, 12배 높은 수치다.
연구 책임자인 김승섭 교수는 “노동자들이 업무 중에 화장실을 이용하게 해달라고 했던 것은 18세기 산업혁명 시기에 나왔던 요구인데, 2018년에 값비싼 명품 화장품을 팔고 있는 노동자들이 화장실에 가지 못해 방광염에 걸리고, 앉지 못해서 하지정맥류에 시달리는 것이 이 연구가 말해준 현실”이라고 말했다.
■노동자들이 말하는 ‘명품 화장품 매장에서 일한다는 것’
“면세점 명품 화장품 매장에서 일하면서 아이를 갖고 출산했습니다. 임신한 10개월 동안 앉아본 적이 없어요. 의자가 없거든요. 다리가 붓고 배가 아파도 서 있어야 합니다. 쉬는 시간에야 겨우 계단에 담요를 깔고 쉬었죠. 15년 전 일이지만, 시간이 멈춘 것처럼 지금도 상황은 똑같아요.”
17일 ‘백화점·면세점 화장품 판매직노동자 근무환경 및 건강실태 조사결과 발표’에 나온 최상미 엘카코리아 노조 부위원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경험을 이야기하다 결국 울먹였다. 엘카코리아는 에스티로더, 바비브라운, 달팡 등 해외 유명 화장품 브랜드를 보유한 에스티로더컴퍼니의 한국 지사다.
화장품을 파는 노동자들은 단정한 유니폼을 입고 백화점 1층과 면세점 한복판의 화려한 조명 아래서 일하지만 최씨는 “우리 일터는 화려하지 않고 처참하다”고 했다. 앉아서 쉬기는커녕, 직원들 대부분은 화장실도 제 때 가지 못한다. 최 부위원장은 “매출은 천정부지로 올랐는데 화장실이 모자라 어떤 면세점에서는 볼일을 보려면 지하 1층까지 가야 한다. 직원들이 방광염에 걸리고, 방광염 약 부작용으로 입이 마르고 몸이 가려운데도 화장실에 가고 싶어질까 봐 물을 마실 수도 없다”고 했다.
일본 화장품 브랜드 지사인 한국시세이도 노조의 김수정 사무국장은 “하루종일 구두를 신고 서서 메이크업을 하다 보니 무릎과 허리, 종아리 통증이 온 것은 물론, 발가락이 다 휘고 보기 흉할 정도로 굳은살이 생겼다”며 “맨발로는 창피해서 돌아다닐 수가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하지정맥류 수술을 받은 동료도 있다.
난임과 불임을 겪거나 아이를 유산한 여성노동자들도 많다. 김 사무국장은 “같이 일한 동료가 임신을 했는데, 계속 서서 일하다 보니 자궁이 처져서 유산 위험이 크다며 자궁을 봉합하는 수술까지 했다”고 말했다. 디올, 겔랑, 메이크업포에버 등의 브랜드를 보유한 LVMH 한국지사의 전하영 전 노조위원장은 “저도 5개월 반만에 유산한 경험이 있는데 유산하고 사흘만에 나와서 일을 해야 했다”며 “임신 9개월의 태아가 목에 탯줄이 감겨 사산돼도, 우리가 오래 서서 일해 그렇게 됐다는 증거가 없어 산업재해 인정도 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감정노동도 심했다. 김명신 LVMH노조 부위원장은 “20대 초반 직원 한 명은 ‘다른 고객을 응대하는 동안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고객이 손거울을 벽장에 던지는 일을 겪었는데, 아직도 트라우마에 시달려 사람이 다가오면 움찔하며 물러서는 증상을 보인다”고 전했다.
■ 앉을 수 없는 의자
“의자가 있어요. 그런데 앉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화장품 매장 노동자들은 충격을 거의 흡수하지 못하는 딱딱하고 매끄러운 바닥에 서서 일한다. 잠깐이라도 의자에 몸을 기대 쉬는 것이 절실하다. 노동단체에서 지속적으로 ‘앉을 권리’를 요구한 끝에 2008년 고용노동부가 대형유통매장에 의자를 비치하도록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규정을 마련했다. 그 후 10년이 지났으나 백화점·면세점에서 일하는 이들은 여전히 앉지 못한다.
김승섭 교수팀이 백화점·면세점 화장품 판매 노동자 2806명을 조사해보니 27.5%인 771명은 “일하는 곳에 직원용 의자가 없다”고 답했다. “의자가 있지만 업무가 없을 때에도 앉지 못한다”는 사람이 37.4%인 1050명이었다. 백화점 관리직들은 매장 직원들이 앉아있으면 고객을 맞이하는 태도가 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해 앉지 못하게 한다. 면세점 화장품 매장에서 14년 동안 일한 ㄱ씨는 “손님이 없어도 의자에 앉을 수 없고, 서류작업을 할 때만 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은 다리 핏줄이 튀어나오고 조금만 걸어도 다리가 무겁고 아픈 하지정맥류, 발에 염증이 생겨 발뒤꿈치가 아픈 족저근막염, 발가락이 뒤틀리는 무지외반증을 얻는다. 조사대상자의 72.2%인 2027명은 발에 생기는 질환 때문에 “작업화를 발 사이즈보다 크게 신청한다”고 답했다.
매장 밖에도 쉴 곳은 마땅치 않다. 58.1%가 “지난 한 달 동안 휴게실을 사용하지 못했다”고 했다. 휴게실이 있어도 사정은 비슷하다. 조사대상자들은 “휴게실 의자수가 부족하다(65.7%)” “휴게실 면적이 좁다(47.5%)” “휴게실이 멀다(26.3%)” 등을 이유로 들었다. 백화점 화장품 매장 직원들은 주로 카페(47.9%), 직원식당(38.6%), 비상계단(37.5%), 백화점 외부(35.9%)에서 쉰다고 했다. 김 교수는 “판매직 남성 노동자들은 아예 휴게실이 없는 경우가 더 많다”고 말했다.
■ 화장실에 못 가요
이들은 또한 가장 기본적인 생리활동인 물마시기, 화장실 가기를 하지 못해 각종 질병에 시달린다. 59.8%인 1677명은 “지난 1주일 동안 근무 중 화장실에 가고 싶었는데 가지 못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매장에 인력이 없어서(62.4%)” “화장실이 멀어서(21.6%)” “화장실 칸 수가 부족해서(24.1%)”가 주된 이유였다. 20.6%인 578명은 “지난 1년 동안 방광염으로 진단·치료를 받았다”고 답했다. 17.2%인 466명은 “지난 6개월 동안 생리대를 제 때 교체하지 못해서 피부질환, 염증이 생긴 경험이 있다”고 했다. 응답자의 42.2%(1185명)는 화장실에 가지 않기 위해 목이 말라도 물을 마시지 않았다. 5.2%(147명)가 성대결절에, 38.4%(1077명)가 안구건조증에 시달렸다.
백화점·면세점들은 ‘앉을 권리’를 묵살한 것처럼 아예 내규를 정해 노동자들의 ‘화장실 갈 권리’도 뺏고 있었다. 몇몇 백화점들은 고객용 화장실과 엘리베이터, 휴게실을 이용하지 못하게 직원 규정에 명시했다. 전하영 LVMH 코스메틱스 노동조합 위원장은 “고객이 불편해 한다면서 화장실을 못 쓰게 하는데, 제가 보기엔 ‘불편’보다는 ‘불쾌’해하는 일부 고객들의 요구 탓인 것 같다”고 말했다. 백화점에서 17년 동안 일한 ㄴ씨는 “고객용 시설을 이용하면 관리자가 난리를 치고, 고객의 컴플레인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백화점은 ‘블랙컨슈머’에겐 관대하면서도 직원들에겐 엄격했다. “혼자 사냐, 나중에 술 한잔 하자” “그 입술에 묻은 꿀은 누가 먹느냐”는 성희롱, 제품을 바꿔주지 않자 집어던지고 할퀴어 직원에게 상처를 낸 사례가 이날 발표회에서 언급됐다. 판매 노동자들은 “고객들로부터 업무·규정상 불가능한 요구나 경험을 당했다(82.5%)” “깔보거나 업신여김을 당했다(36.6%)” “인신공격을 당했다(27.7%)”고 했다.
■ “조직이 외면하면 우울증이 생긴다”
전체의 6.1%가 우울증, 2.4%가 공황장애로 지난 1년 동안 진단·치료를 받았는데 이는 비슷한 연령대 여성의 3.5배, 12배다. 김교수는 “조직이 부당한 일을 당한 노동자들을 위해 행동하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공황장애와 우울증 발생비율이 달라질 수 있다”며 “매장 측도, 이들을 파견한 회사도 갑질로부터 보호해주지 않는 것이 공황장애와 우울증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조사대상자의 절반 가량인 49.8%가 “동료의 유산을 목격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본인의 유산경험이 있다고 한 사람도 11.4%나 됐다. 64.9%는 육아휴직을 쓰지 못했다. 일하다 질병이 생겨도 산업재해로 인정받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전하영 LVMH 코스메틱스 노동조합 위원장은 “제 주변에서 산재 신청을 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며 “회사에서 실비보험에 가입하고 웬만하면 보험으로 정산을 받도록 회유한다”고 말했다. 최 부위원장은 “나도 허리 디스크로 산재 처리를 받으려고 했는데, 막상 병원에 가니 그동안 계속 아팠다는 기록이 계속 쌓여있지 않으면 승인이 어렵다고 했다. 하지정맥류는 업무 때문임을 증명하기가 너무 어려워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판매직 노동자들을 보호할 제도가 생기고 있지만 아직은 불완전하다. 지난 3월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통과됐고 이달 18일부터 시행된다. 고객을 응대하다가 폭언을 들어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기업은 노동자의 업무를 일시적으로 중단·전환하고 상담 치료를 지원해야 한다. 일명 ‘감정노동자 보호법’이다. 이성종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 집행위원장은 “이 법은 사업주가 직접 고용한 직원에 대해서만 조치하도록 했는데 백화점에서 일하는 사람 중 실제 백화점에 고용된 직원은 10%뿐”이라며 “원청 사업자들이 협력업체나 간접고용 노동자들도 보호하도록 하는 내용이 법에 담겨야 한다”고 말했다.
'일하고 돈 벌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주노총 임시대의원회의 무산 ‘경사노위’ 참석 여부 결정 못해 (0) | 2018.11.30 |
---|---|
불법체류 외국인들 ‘골라서’ 고용한 뒤 임금 6000만원 떼어먹은 고용주 구속 (0) | 2018.11.27 |
정규직 아닌 자회사 직원으로 전환 ‘꼼수’…되레 해고 위기 몰린 공공기관 비정규직 (0) | 2018.11.27 |
반년만의 노사정대표자회의서 ‘연금개혁특위’ 출범 결정 (0) | 2018.11.27 |
[2018국감]반복, 또 반복···노동부 국감장서 또 벌어진 최저임금·소득주도성장 공방 (0) | 2018.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