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원 기자 2018.10.19
“싸가지 없는 것. 그 나이가 되도록 기본이 전혀 안 돼 있어. 어디 못 배워먹은 사람처럼 싸가지 없이 결재판을 국장 책상 위에 올려놔!” 한 특수법인에서 일하는 ㄱ씨가 결재판을 상사인 ㄴ국장 책상에 올려놨다는 이유로 들은 말이다. 욱하는 성격의 ㄴ국장은 늘 화를 참지 못하고 사무실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는 사람이었다. 반복되는 폭언을 참다 못한 ㄱ씨가 “몇 달 동안 버텼으니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치자 ㄴ국장은 “OO년, 이런 OO같은 년”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산업기능요원 종사자인 ㄷ씨는 어느 비가 오는 날 음식물 폐기물이 쏟아진 현장을 치우고 있었다. 비가 많이 왔고 퇴근시간도 돼 현장 상사에게 내일 치우겠다고 양해를 구한 뒤 손을 씻고 퇴근 준비를 하던 중 ㄹ이사가 “지금 몇 시야? 다 튀어들어와 이 새끼들아”라고 소리를 쳤다. ㄹ이사는 ㄷ씨와 동료들에게 “6시에 퇴근 지문을 찍으려면 몇 시에 현장에서 나와야 하는 거냐”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ㄷ씨는 “비 맞으면서 밖에서 더러운 쓰레기 치우다가 손 씻고 퇴근하려던 죄밖에 없는데, 그런 욕설과 폭언을 들어야 했나 너무 억울했다”고 했다.
민간기업에 다니는 ㅁ씨는 최근 상사로부터 “대가리도 나쁜 것들이. 니네 그렇게 똑똑하다며 왜 못해? 대가리에 똥만 들었으니 못 하지. 월급을 받아 처먹으면 양심이라는 게 있어야 될 것 아니야” 등의 욕설과 폭언을 들었다. 상사는 “너네 좋아하는 거 있잖아. 법으로 하는 거, 인터넷으로 떠드는 거. 신나게 떠들어 개같은 회사라고”라며 소리쳤다.
최근 노동시민사회단체 직장갑질119에 들어온 상담과 제보 내용들이지만, 이를 노동법으로 처벌할 길은 없다. 현행 근로기준법에는 ‘사용자의 폭행’을 처벌하는 규정만 있고 모욕과 폭언을 금지하는 조항은 없는 탓이다.
폭언을 견디다 못해 퇴사하면 ‘자발적 퇴사’로 분류돼 실업급여를 받지 못한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도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어렵다. 부하직원에게 물컵을 집어던진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에 대해 검찰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도 직장 내 괴롭힘을 처벌할 명확한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직장갑질119는 19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된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이달 정기국회에서 통과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용득 의원 등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라고 불리는 근로기준법 개정안 등을 발의했다. 직장내 괴롭힘을 금지하고 예방과 사후조치를 취업규칙에 명시하도록 했고, 이로 인한 질병을 업무상 재해로 규정하도록 산업안전보건법과 산재보상보험법 등도 개정했다.
이 개정안은 지난달 12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했지만 아직까지 법사위를 통과하지 못하고 잠들어 있다.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들이 “직장 내 괴롭힘의 정의가 불명확해 혼란이 생길 수 있다”고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개정안은 직장 내 괴롭힘을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정서적 고통을 주거나 업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 정의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법안을 발의한 이용득 의원은 “직장 내 성희롱과 마찬가지로 근로기준법에 개념을 규정하고 하위 법령이나 가이드라인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직장갑질119는 “개정안에도 가해자나 이를 방치한 회사에 대한 처벌규정은 없었지만, 그나마 피해자들이 산업재해 등을 인정받을 수 있었는데 이조차 통과되지 않고 있다”며 “국회 법사위는 지금 당장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통과시키고 이달 안에 본회의에 상정해 처리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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