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폐기돼 역사 속으로 사라진 중·고교 국정 역사교과서. 경향신문 자료사진
교육부가 ‘뉴라이트 사관을 따랐다’는 비판을 받아왔던 역사과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을 결국 개정하기로 했다. 폐기된 국정 역사교과서 대신 학생들이 사용할 새 검정 역사교과서가 국정교과서와 같은 집필기준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을 받아들인 것이다. 새 한국사·역사 교과서는 예정보다 2년 늦은 2020년부터 학교현장에 적용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과 그에 이은 검정교과서 개발과 관련한 문제는 이번 조치로 일단락됐다.
교육부는 26일 “학계와 학교 현장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국정교과서 폐지 후속조치를 시행한다”며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을 개정해 2020년 3월부터 새 역사교과서를 현장에 적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문제는 편향적 ‘2015 역사과 교육과정’
교육부는 2015년 9월 ‘2015 개정 교육과정’을 발표했다. 같은 해 10월 시작된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은 이 교육과정에 기반한 것이다. 2015 역사과 교육과정에는 중·고교 모두 현대사 부분에서 2009 교육과정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표현이 “대한민국 수립”으로 변경돼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1948년 8월15일을 정부 수립일이 아니라 건국일로 보는 뉴라이트 학자들의 주장을 반영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중학교에서는 1930년대 이후 독립운동을 거의 기술하지 않았고 고교에서는 근현대사 비중을 줄이는 등 독립운동사의 비중을 대폭 축소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을 ‘독재’라는 말 대신 ‘권위주의 정권’이라고 표현해 의미를 축소시키기도 했다. 민주주의와 산업화는 ‘자유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이라는 용어로 바꿔 시장주의 이념을 부각시켰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국정교과서 집필기준도 이에 따라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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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는 집필기준을 끝까지 공개하지 않아 ‘복면집필’이란 말까지 자초하다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지난해 11월 말 현장검토본 공개를 사흘 앞두고서야 집필기준을 공개했다. 뒤늦게 공개된 집필기준 역시 ‘친일파 청산’을 ‘친일 청산’으로 바꾸거나 건국절 개념을 수용하는 등 뉴라이트 사관 일색으로 채워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새마을운동에 대해서는 ‘농촌 근대화의 일환으로 추진됐고 이 운동이 최근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음에 유의’ 해야 한다고 적시했고, 제주 4·3 사건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수립을 전후해 제주 4·3사건이 발생하였음에 유의한다’고 나와 있는 등 군사독재를 미화하라는 가이드라인도 포함됐다. 실제 공개된 국정 역사교과서에는 이같은 내용이 고스란히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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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만 검정교과서’ 우려에 교육과정 변경
교육부는 2017학년도부터 중학교 역사·고등학교 한국사 과목에 국정교과서를 쓰도록 할 예정이었지만 각계의 반발에 부딪혀 올해 초 국정 체제를 국·검정 혼용 체제로 바꾸기로 하고 새 교과서 사용 시기도 2018학년도로 1년 미뤘다. 하지만 학계와 교육계는 국정교과서를 대체할 새 검정교과서를 개발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해 교과서의 질이 떨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교육부가 정한 일정대로 검정교과서 개발을 진행할 경우 이념편향적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을 그대로 따르게 된다는 데 있었다. 검정교과서라도 교육부가 정한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을 반드시 따라야만 하게 돼 있다. 사실상 문제가 됐던 편향적 국정교과서와 다르지 않은 결과물이 학교현장에 배포될 수 있었던 셈이다. 학계에서는 “집필기준과 교육과정 구성을 바꾸지 않고 만드는 새 검정교과서는 검정으로 위장한 꼼수 국정교과서”라는 말이 나왔다.
‘국검정 혼용’을 고집하던 교육부는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역사교과서 폐지’ 업무지시에 따라 지난 5월16일 결국 중·고교 역사교과서를 국·검정 혼용체제에서 검정체제로 전환하는 행정예고를 발표했다. 같은 달 31일 개정고시가 관보에 게재되면서 국정 역사교과서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문 대통령은 국정교과서 폐지를 지시하며 “검정교과서 집필기간을 확보하기 위해 현행 2015 개정 교육과정 변경을 위한 수정고시를 하라”고도 당부했다. 이에 따라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을 전면 손보게 된 것이다.
교육부는 지난 6월부터 한달여 동안 검정 역사교과서 개발에 대한 의견을 수렴했다. 그 결과 교육과정은 개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 집필기준은 ‘개정’과 ‘폐기’로 양분됐다고 교육부는 밝혔다. 교육부는 이에 따라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을 모두 개정하기로 했다. 건국절 문제, 근현대사 비중 문제 등 편향적 역사관으로 논란이 됐던 문제들이 모두 수술대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는 이달 말 교육과정 총론 부칙을 개정해 새 역사교과서를 2020년부터 현장에 적용토록 할 계획이다. 다음달부터는 세미나와 공청회 등을 거쳐 역사과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을 재검토한 뒤 내년 1월 새 교육과정과 검정교과서 개발 계획을 발표한다. 이에 따라 당분간 학교현장에서는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역사교과서를 사용하게 된다.
한상권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상임대표는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은 교과서의 설계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기 때문에 ‘무늬만 검정교과서’가 되지 않으려면 이번 조치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며 “이번에는 교육과정을 만들기 전에 학계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해 헌법 정신에 입각한 좋은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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