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범 기자 ksb1231@kyunghyang.com
민주노총이 청와대가 주최한 초청 행사에 불참하면서 문재인 대통령과 노동계의 공식 만남은 반쪽짜리 행사에 그쳤다.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높아진 상황에서, 민주노총은 뚜렷한 명분 없이 대화의 물꼬를 틀 기회를 외면했다는 비판을 받게 됐다. 이번 불참 결정에 민주노총 산하 조직들의 불만도 나오고 있어 지도부의 리더십도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총은 24일 오후 성명을 내 “오늘 대통령과의 간담회와 행사에 최종적으로 불참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청와대는 이날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노동계 대표를 초청해 간담회와 만찬을 했다. 성사됐다면 민주노총은 2003년 이후, 한국노총은 2015년 이후 처음으로 공식 초청을 받아 대통령과 만나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청와대가 민주노총 소속 개별 노조들을 초대하는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나왔다. 민주노총은 “청와대는 2부 만찬행사에 민주노총 소속 산별 및 사업장을 개별 접촉했고, 이 과정에서 마치 민주노총이 양해한 듯 왜곡했다”고 항의했다. “대화 상대인 민주노총을 존중하지 않고, 조직체계와 질서를 훼손하는 행위”였다는 것이다.
행사 성격에 대한 양측의 시각차도 한몫했다. 민주노총은 이날 만찬이 청와대의 이벤트 성격이 짙다고 판단했다. 노동계는 대통령과 양대노총 대표자 간담회를 중요하게 본 반면, 청와대는 2부 만찬에 방점을 뒀다. 만찬에 초청된 노조는 한국노총 산하 핸즈식스노조, 국회환경미화원노조, SK하이닉스노조, 자동차노련, 금융노조와 민주노총 산하 영화산업노조, 희망연대노조, 서울지하철노조, 정보통신산업노조, 보건의료노조 10곳이다. 상급단체에 가입하지 않은 청년유니온과 사회복지유니온도 초대됐다. 모두 정규직노조의 연대와 노동시간 단축,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 현 정부의 노동정책과 궤를 같이하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둬온 곳들이다. 민주노총은 “1부의 진정성 있는 간담회보다 2부 정치적 이벤트를 위한 만찬행사를 앞세우는 행보를 보였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16개 산별노조 대표자들이 모두 참석하지 않으면 2부 만찬은 참가하지 않겠다”고 했고, 청와대가 ‘만찬에 오지 않을 계획이면 1부에도 오지 않는 게 좋겠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표면적으론 행사 초청과정에서의 엇박자를 문제삼았지만 결국 내부 조직논리와 갈등 끝에 대화의 판을 접은 셈이 됐다. 그 이면에는 노사정 대화에 대한 민주노총 지도부의 경계심도 자리잡고 있다. 노동계는 노사정위원회를 ‘정부가 재계를 편드는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본다.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에도 유명무실해진 노사정위를 복원하는 것보다는 노·정 직접교섭으로 먼저 신뢰를 쌓아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날 청와대 간담회에는 문성현 노사정위원장도 배석했는데, 앞서 민주노총은 노사정위 복귀 수순으로 비칠 것을 우려해 강력히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유야 어쨌든 민주노총은 대화의 가능성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정부가 최근 박근혜 정부의 양대지침을 폐기하는 등 노동계 친화적인 행보를 보이는 상황이어서, 민주노총의 결정이 사회적 대화를 원하는 여론의 공감대를 얻기는 힘들다는 지적이다. 지난 8월 한국노동연구원 설문조사에 따르면 사회적 대화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감은 보수정권 때보다 한층 커진 것으로 나타났다. 한 노동계 출신 인사는 “신뢰 회복부터 하자면서 정부가 내민 손을 걷어찬 것은 모순”이라며 “민주노총이 대중 조직으로서 책임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민주노총 내부에서도 불만이 나온다. 민주노총은 새 정부 초기부터 노사정 대화를 놓고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보여 왔다. 노사정 대화는 시기상조라는 현 지도부와, 정부와의 협상으로 얻어낼 것은 얻어내자는 몇몇 산별노조 사이 의견이 갈렸기 때문이다. 만찬에 초청됐던 보건의료노조는 노사정 협업을 통한 ‘의료산업 일자리 1만개 창출을’, 희망연대노조는 LG유플러스 설치기사들의 원청 직접고용 등을 강조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지도부 지침 탓에 결국 참석을 포기했다. 희망연대노조 관계자는 “국민들에게 현안을 알릴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조합원들 불만이 많았지만 상급단체 지침을 정면으로 거스르기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한상균 위원장이 수감돼 있는 상태여서, 민주노총 리더십 문제와 조직 내 갈등은 집행부 임기가 끝나는 올 12월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조성재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연구본부장은 “당분간 정부와 민주노총 사이 냉각기가 지속될 것”이라며 “국민 여론이 돌아서면 사회적 대화에 열린 자세를 보여야 한다는 민주노총 내부의 목소리가 점차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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