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선봉에 섰던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60)가 1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으로 취임했다. 한국의 대표적 근현대사 연구자 중 한 사람인 주 관장은 다수 역사교과서의 집필진으로 활동하며 검인정 교과서에 대한 ‘좌편향’ 딱지,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에 맞서왔다.
주 관장이 취임하자 그간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뉴라이트 역사관을 홍보하는 기능만 해왔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이제야 편향을 걷어내고 근현대사의 여러 측면을 조명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쏟아지고 있다. 그가 이날 페이스북에 취임 소식을 알리자 축하와 기대의 댓글 수백개가 달렸다. 주 관장은 이날 오후 경향신문과의 취임 후 첫 인터뷰에서 “역사학계 통설과 달리 정치적으로 해석된 전시물들을 수정해 많은 분들이 오고 싶어 하는 박물관, 갈등이 아닌 화합의 역할을 하는 박물관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한국 근현대사를 주제로 하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성공과 기적의 대한민국 역사를 후세에 전승”하겠다는 목적으로 2012년 개관했다. 박근혜 정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시도하기 전 이명박 정부도 이미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이름으로 역사 왜곡 작업을 했던 셈이다.
그 결과 이 박물관은 경제개발과 근대화의 역사에만 지나치게 치중해 민주화운동과 경제개발의 그늘, 독재정권의 인권유린 등 현대사의 어두운 면을 다루는 데는 소홀했다. 2층부터 4층까지 이어지는 상설전시실에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설명하는 부분에 ‘정부 수립 태동’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주진오 신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이 1일 오후 서울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관장실에서 박물관 운영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해방 이후 역사에서도 박정희 정권 시절의 경제개발과 새마을운동이 주요하게 배치된 반면 4·19혁명이나 5·18민주화운동 등과 관련된 전시물은 적다. 조선이 강화도조약으로 근대화를 시작했다는 등 식민지근대화론에 가까운 내용을 담은 특별전시가 논란이 된 일도 있었다. 주 관장은 “상설전시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의미를 제대로 담지 못하거나 경제성장과 개발에만 치중해 민중의 역사에 소홀했던 점은 문제”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학계 안팎에서는 주 관장의 취임을 ‘역사 왜곡을 끝내는 마침표 인사’로 바라보며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 많다. 이 박물관을 세우는 과정과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에서 나타난 공통된 문제로 주 관장은 “정치인들이 역사를 역사학자들에게 맡기지 않고서, 특정인들이 생각하는 역사를 우리 역사의 전체인 것처럼 독점하려 한 것”을 지목했다.
그는 “일각에서 역사학자 90%가 좌편향이라고 했는데 90%가 편향됐을 수는 없다. 그런 말을 한 10%가 편향됐던 것”이라고 했다.
주 관장은 또 “많은 사람들이 합의할 수 있는 내용을 박물관에 전시하고 교과서에 써야 하는데 소수의 생각을 가진 이들이 정치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그것을 밀어붙이면 안된다”며 “안타깝게도 그동안 역사학계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유리돼 있었는데 이를 결합하는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전시의 내용과 방향에서 정치권력의 입맛에 따르는 관행을 끊고, 학계의 공론과 합의를 거쳐 결정하겠다면서 “학예사들을 비롯한 내부 구성원들의 토론과 합의를 통해 박물관을 바꿔나가겠다”고 말했다.
주 관장은 임시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부터 현대까지를 다루는 역사학자와 사회과학자들로부터 앞으로 박물관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의견을 들을 예정이다. 박물관 소셜미디어 운영을 활성화해 전문가집단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의견을 두루 수렴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주 관장은 “정치권력이 역사를 농단하지 않고 역사 전문가들의 토론과 논쟁을 거쳐 만들어낸 결과물을 전시하고 교육한다면 편향됐다고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 관장은 진보적 경제학자이자 민주화운동가였던 고 주종환 동국대 명예교수의 아들로, 동생은 ‘청문회 스타’로 불린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이사다. 주 관장은 ‘과거’를 다루는 역사학자이면서 ‘현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거리낌없이 발언을 해왔다. 그의 관심사는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제3세계의 연대로까지 이어져 있다. 그는 최근까지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지원하는 아프리카 중부 콩고민주공화국 국립박물관 건립 사업을 3년간 총괄하면서 박물관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고 했다.
식민지배와 내전, 독재의 역사를 가졌고 다양한 언어와 부족집단이 존재하는 이 나라가 과거를 극복하고 국민들의 화합을 이뤄내는 데 박물관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는 “다른 언어, 다른 부족이지만 공통의 역사와 기억, 경험이 있고 한 국가의 국민이라는 의식을 만드는 ‘국가 건설’에 박물관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봤다”며 “우리 역사도 이제는 국민들을 통합하는 데 기여해야지 분열과 갈등을 유발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역사를 갈등의 수단이 아니라 화해의 수단으로 삼기 위해서는 문제를 덮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 극복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친일 문제를 드러내려 하면 왜 갈등을 부추기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문제를 덮어놓는다고 갈등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라며 “오히려 문제를 제대로 드러내 잘못한 사람들이 사과하고 반성하도록 하고, 피해자들이 사과와 반성을 수용하는 과정을 밟아야 용서와 화해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주진오 신임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장 프로필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한국사교과서집필자협의회 대표
·서울시교육청 역사교육위원장
·제주 4·3 70주년기념 범국민위원회 상임공동대표
주 관장은 조만간 역사학계의 의견을 수렴해 근현대사의 어두운 부분들을 반영하도록 상설전시실의 전시물 일부를 수정할 계획이다. 그는 “전시 내용 중 역사학계의 통설과 달리 정치적으로 해석돼왔던 부분들은 앞으로 정리해나가려고 한다”며 임시정부 수립의 의미를 바로 세우는 일, 우리 역사의 어두운 부분을 조명하는 일 등을 앞으로의 과제로 꼽았다.
그는 “친일과 독재, 그로 인해 국민들이 겪은 집단 피해, 일본군 위안부의 아픔 등 국민적 아픔 같은 것들을 대한민국 역사 안에 전시하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특히 4·3사건처럼 우리 민족의 커다란 아픔이었지만 오랫동안 외면받아온 역사가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다. 주 관장은 “산업화와 성장, 개발의 역사를 부정하겠다는 게 아니라 이와 함께 그 시대의 민중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함께 조명해가려 한다”며 “역사를 정치화, 이념화해 갈등의 소재로 삼기보다는 다양한 역사인식이 공존하고 타협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소수의 학자들만 관심을 가지는 박물관이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를 쉽고 재미있게 전달해 대중들에게 관심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과제다. 그래서 전시 형식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기기에 익숙했던 청소년들에게 유리상자에 갇힌 유물만 보라고 한다면 영영 박물관에 흥미를 가지지 못할 것 같다는 게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를 지낸 그의 고민이다.
주 관장은 “학생들이 다시 오고 싶어 하는 박물관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디지털 기술을 도입해 직접 학교에서 배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시뿐 아니라 교육, 복합문화예술공간이 되게 하려 애쓸 생각이다. 상설전시로 소화하기 어려운 부분은 다양한 기획전시와 특별전시로 보완하고, 인디밴드 등을 초청해 주변 광화문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박물관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생각 중이다.
우수한 근현대사 연구 성과를 영문으로 번역해 소개하고, 외국 한국학과 학생들을 찾아가 강연을 하고 간단한 전시도 하겠다는 꿈도 갖고 있다.
주 관장은 “앞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역사교사들이 학생들을 데리고 찾아오고 싶은 공간, 한국 근현대사를 어떻게 우리가 정리하고 이해할 것인지를 논의하는 공론의 장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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