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온 납땜을 할 때 환기가 너무 안 돼 연기가 많이 났습니다. 아프고 나서 제일 후회하는 건 그런 것들이 몸에 해롭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하는 겁니다. 여러 명이 같이 암에 걸려도 내가 몸이 약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산업재해’라는 생각조차 못합니다. 이번 산재인정으로, 영세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무엇이 몸에 해로운 지 제대로 알고, 아프지 않게 일할 환경이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삼성반도체 유방암 피해자 김경순씨)”
법원이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하청업체 직원의 유방암을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그동안 방사선 노출이나 장시간 노동 등을 이유로 유방암이 산재로 인정된 사례는 있었지만, 작업장에서 나온 유해물질을 유방암의 원인으로 들어 업무상 재해로 인정한 판결은 처음이다.
13일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은 서울행정법원이 지난 10일 삼성전자 반도체 하청업체 직원 김경순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불승인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고 밝혔다.
김씨는 2006년 9월 삼성반도체 하청업체 ‘큐티에스’에 입사해 5년3개월 동안 삼성전자 온양사업장 등에서 납품받은 불량 반도체 칩을 화학물질을 이용해 떼어내고, 이를 씻어낸 뒤 고온의 설비로 재가공하는 일을 했다. 안전장비는 간단한 마스크와 고무장갑 외에는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씨는 2011년 11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같은 사업장에서 일했던 여성 노동자 20여명 중 김씨를 비롯해 4명이 유방암에 걸렸다. 김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냈으나 공단은 “업무 환경과의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씨는 2015년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냈고, 지난 10일 법원은 근로복지공단의 요양급여신청 불승인 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은 법원이 작업장 유해물질과 유방암 사이의 인과관계를 처음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재판부는 “발병 경로가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원고(김씨)가 다소 비정상적인 작업환경을 갖춘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동안 산화에틸렌 등 발암물질을 포함한 각종 유해화학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 유방암이 발병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또 “근로자에게 책임 없는 사유로 사실관계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점은 증명책임에 있어 열악한 지위에 있는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인정할 수는 없다”라며 산재 입증 책임이 노동자 개인에게 과도하게 지워진 문제도 지적했다.
근로복지공단이 산재승인 거부의 이유로 든 산업안전보건연구원(산보연) 역학조사의 한계도 지적됐다. 근로복지공단은 해당 사건 역학조사를 산보연에 의뢰했는데, 재판부는 “(역학조사는)2009년 이후 자료만을 전제로 이뤄진 한계가 있다”며 “결국 원고(김씨)가 직전 사업장에서 근무한 2006년 9월부터 2009년 8월까지의 근무시간, 근무형태, 작업환경 등에 관한 조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재판부는 또 “산보연 역학조사에서는 이 사건 상병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인 ‘산화에틸렌’의 존부에 관한 분석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산보연 측에서 “산화에틸렌 가스 노출량의 확인을 위해 역학조사를 다시 의뢰해 달라”는 회신까지 받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데, 재판부는 “이러한 피고(근로복지공단)의 잘못으로 부실하게 된 역학조사를 근거로 원고에게 불리한 처분을 한 것은 매우 부당한 처사”라고 판시했다.
반올림은 성명을 내 “반도체 사업장은 안전보건관리를 소홀히 해 노동자들을 병들게 한 책임을 통감하고 제대로 된 사과와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하라”라며 “고용노동부, 산업안전보건공단 등 사업장 환경 관리 감독기관은 작업환경측정과 역학조사를 철저히 해 원·하청 모든 반도체 노동자의 안전한 작업환경을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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