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5세 ‘한울반’ 아이들은 내년 3월 초등학생이 된다. 3주 후면 정든 유치원을 떠난다. 교사는 ‘졸업하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을 포스트잇에 적어보자고 했다. 선생님과 드라마 찍기, 영화 만들기, 과학실 꾸며서 장난감 만들기…. 각양각색의 바람들이 담겼다. “더 있으면 적으세요”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은 다시 포스트잇을 집어들었다. 교사는 “이거 다 기획하려면 고생 좀 하겠다”며 웃었다. 지난 26일 오전 세종 고운동 두루유치원 풍경이다.
이날 ‘해솔반’ 아이들은 넓은 도화지에 1년 동안 찍은 사진을 붙여놓고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교사가 “무얼 자랑하고 싶어요”라고 묻자 아이들은 고사리손으로 사진들을 가리켰다. 세찬이는 비온 날 물총놀이를 한 것과 나무로 인형을 만든 것을 자랑하고 싶다고 했다. 지은이는 무지개색 목걸이를 만든 것, 유성이는 모형 배를 물에 띄운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해밀반’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밖에 쌓인 눈 속에서 놀던 아이들은 점심 때가 돼서야 발그레한 얼굴로 돌아왔다.
유치원 1층에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써놓은 공간이 있다. 엄마랑 같이 설거지, 차 마시기, 팽이놀이, 미로탐험, 얼음땡놀이, 방방놀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두루 다모임’ 시간에 나온 것이다. 몇몇 바람들은 지난 11월 ‘온두루 축제’ 때 함께했다. 게시판 한 쪽에는 ‘모든 순간이 배움인 아이들’이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두루유치원은 지난해 3월 ‘혁신유치원’으로 지정됐다. 세종시의 30여개 유치원 중 최초다. 혁신유치원은 유아와 교사, 학부모가 공동체를 이뤄 유아 중심 교육문화를 만들어가는 공·사립 유치원이다. 교육과정이나 평가에서 자율성이 많이 보장된다. 초등학교 선행학습을 하는 곳이 아니라 유아기부터 삶의 주체가 자신임을 깨닫게 하는 교육터 역할을 한다.
교사들은 ‘관점의 전환’이 일반 유치원과 가장 다른 점이라고 했다. 원장과 부장교사가 만든 교육과정을 따르는 게 아니라, 교육과정을 설계할 때부터 아이들의 목소리를 담는다. 교사들도 정해진 교육과정이 아니라 학급에 맞는 커리큘럼을 찾는다. 전형화된 발달과정에 따라 평가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 하나하나의 성장과정을 존중한다.
두루유치원 교사들은 ‘전문적 학습공동체’를 운영하며 교육과정을 연구하고 서로 나눈다. 학부모들은 캘리그래피(문체 디자인)나 캠핑 같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교육을 고민하고 재능기부를 한다. 교무부장 박지현 교사는 “교원들끼리 서로 존중하고 공감하는 민주적인 분위기가 학급으로도 이어졌다. 유아, 교원, 학부모 누구든 언제나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다. ‘긍정의 순환’이 일어난 셈”이라고 말했다. 승순화 원장은 “혁신은 성과가 아니라 ‘변화’”라고 했다.
교육부는 유아 중심으로 교육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해 27일 ‘공공성 강화를 통한 유아교육 혁신방안’을 발표했다. 두루유치원 같은 혁신유치원을 지금의 33곳에서 2022년 130곳으로 늘리기로 했다. 한글이나 영어 수업은 교육과정에서 제외한다. 특성화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무분별하게 이뤄지는 방과후 과정을 개선하고, 놀이와 돌봄이 중심이 되는 ‘방과후 놀이유치원’을 2022년까지 50곳으로 늘릴 예정이다.
새 정책의 초점은 아이와 교사, 학부모의 ‘교육공동체’를 강화하는 것이다. 학부모안심인증제를 도입해 시설·설비와 놀잇감이 깨끗하고 안전한지 점검한다. 아동학대나 감염병을 함께 감시하고, 통학차량 안전과 급식의 영양·위생관리를 평가한다. 지역별 학부모회와 학부모 참여 교실을 늘리되, 행정인력을 지원해 교원들 업무는 줄일 방침이다. 병설유치원의 행정인력은 현재 245명에서 2022년 1000명 규모로 늘린다. 시·도교육청별로 정책 방향을 정하고, 유치원 현장의 교육철학과 운영방식을 존중하는 평가기준을 만든다. 사립유치원 교원 기본급은 국공립유치원 수준이 되도록 단계적으로 올릴 계획이다.
혁신유치원이 자리 잡으려면 업무를 효율화해야 한다고 현장에선 입을 모은다. 유치원 행정인력을 늘려도 상부에서 내려오는 ‘공문’ 업무가 줄지 않으면 소용없기 때문이다. 김덕순 두루유치원 원감은 “교사들이 교육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결재 절차를 줄이고 업무 지원팀을 뒀는데도 여전히 교사들의 업무가 많다”고 했다.
방과후 시스템을 재조정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오래 머물다 보니 방과후 교사가 있다 해도 담임교사가 돌봄에 관여해야 한다. 교육과정을 연구할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다. 혁신유치원 숫자를 늘리는 것만큼이나 지속성에 신경써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인사나 육아휴직 등으로 교원이 자주 바뀌기 때문에 혁신유치원의 가치를 지켜나갈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승 원장은 “시교육청이 지원해준 덕에 혁신유치원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며 “상부기관이 큰 방향을 잡아주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면서 현장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함께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공립유치원 늘리고, 저소득층 유치원비 줄인다…교육부 ‘유아교육 혁신방안’
유아교육에서 소외돼온 저소득층과 다문화 가정 아이들, 장애아동들의 ‘유치원 가는 길’이 쉬워진다. 교육부가 27일 발표한 유아교육 혁신방안에는 저소득층 가구의 유아교육비 부담을 크게 낮추고 다문화 가정 유아나 장애가 있는 유아를 위한 유치원 인프라를 확충하는 내용이 담겼다. 국공립유치원 취원율을 높이고, 사립유치원의 공공성을 동시에 끌어올리기로 했다.
먼저 저소득층 유아의 유치원비 부담이 낮아진다. 현재 가구소득 600만원~699만원 가구의 유치원 이용률이 37.7%인 반면 149만원 이하는 18.7%에 그치고 있다. 유아교육 단계에서부터 소득에 따른 격차가 생기는 것이다. 정부는 내년부터 중위소득 50% 이하(4인가족 기준 약 256만원)인 가정의 유아들을 전국 국공립유치원에 우선배정하기로 했다. 사립유치원에 보내는 경우에도 현재 월평균 15만8000원 정도인 학부모 부담금이 어린이집 수준인 약 6만원선으로 줄어든다.
전체 다문화학생 20만명 중 58.4%가 6세 이하 미취학 아동이다. 교육부는 다문화가정이 많은 지역을 위주로 다문화유치원을 확충해 2022년까지 120개로 늘릴 계획이다. 다문화유치원은 언어발달을 지원하고 통합·소통 프로그램을 통해 또래 아이들의 유대를 늘릴 수 있도록 특화된 곳들이다. 지금은 전국에 90곳이 있다. 장애아동이 어릴 적부터 비장애 아이들과 어울려 성장할 수 있도록 공립유치원 내 특수학급을 2022년까지 400개 확충하고, 전국에 1곳뿐인 특수교육 통합유치원을 17개로 늘린다.
현재 25% 수준인 국공립유치원 이용률을 40%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국공립유치원 학급 3600개를 신설한다. 지역 특성에 따라 부지를 마련하기 어려운 도심지역에선 병설유치원 중심으로, 택지개발지구처럼 인구가 새로 몰려드는 곳에는 단설유치원을 중심으로 학급을 늘린다. 병설유치원은 총 1200개, 단설유치원은 총 2400개 학급을 늘릴 계획이다.
지난 9월 일부 사립유치원들이 국공립유치원 확대 계획에 반대하며 집단휴업을 하려 했다가 철회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아이들을 볼모로 잡는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교육부는 사립유치원들의 공공성을 대폭 개선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공영형 사립유치원’들을 지정해 운영비의 최대 절반까지를 지원할 계획이다. 내년에 15개 안팎의 기관을 시범운영한 뒤 단계적으로 늘려가기로 했다. 교육청이 사립유치원을 사들인 후 민간에 위탁, 국공립유치원처럼 운영하도록 하는 ‘공공위탁 방식’도 도입한다.
설립자가 소규모 기관을 폐쇄적으로 운영해 생기는 문제들을 막기 위해 사립유치원을 법인으로 전환하는 방안도 검토하기로 했다. 전체 사립유치원의 87%는 법인이 아닌 개인이 운영하고 있다. 교육부는 내년 상반기 중 정책연구를 통해 사립유치원의 법인 전환을 활성화하기로 했다. 국공립유치원보다 32만원가량 낮은 사립유치원 교원의 기본급은 5년간 6만원씩 올린다. 김상곤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은 “유아교육기는 전 생애에 걸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시기”라며 “앞으로 출발점 단계부터 균등한 교육기회를 주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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