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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사망시 원청 처벌 높이고 감정노동자도 법으로 보호

OECD 꼴찌수준 산재율 오명 씻을까...산재사망시 원청 처벌 높이고 감정노동자도 법으로 보호

해마다 한국에선 산업재해 사고로 1000명 안팎의 사람들이 숨진다. 노동자 1만명 가운데 업무상 사고로 숨지는 사람 수를 가리키는 ‘사고성 사망만인율’은 0.5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인 미국의 0.36, 일본의 0.19, 독일의 0.16보다 훨씬 높다. 하청 구조에 따른 ‘위험의 외주화’는 산업재해가 늘어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정부가 이를 개선하기 위해, 산재에 대해 원청의 책임을 대폭 강화하기로 했다. 또한 콜센터 근무자 등 감정노동자들을 보호할 법안도 만들기로 했다.

정부는 하청노동자가 산재 사고로 사망할 경우 안전조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원청기업에도 하청업체처럼 7년 이하의 징역형 혹은 1억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도록 하는 법 개정안을 내년 국회에 제출, 하반기부터 시행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이낙연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국정현안점검 조정회의에서 이런 내용이 담긴 ‘중대 산업재해 예방대책’을 17일 의결했다. 중대 산업재해는 작업 현장에서 사망자가 나오거나 3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2명 이상, 혹은 10명이 동시에 다치는 사고를 뜻한다.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은 이날 회의 뒤 정부서울청사에서 언론 브리핑을 하며 “조만간 노·사·정이 참여하는 ‘안전제도 혁신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구체적인 산재예방 세부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 방침에 따라 산재에 따른 원청에 대한 처벌은 강화된다. 그동안 원청은 중대 산업재해 때 안전조치를 이행하지 않았을 경우 1년 이하 징역형 혹은 1000만원 이하 벌금형만 받게 돼 있었으나 이를 7년 이하 징역형 혹은 1억원 이하 벌금형으로 강화하기로 했다. 또 지금까지는 22개 ‘위험장소’로 지정된 업무에 대해서만 원청에 책임이 있었지만 앞으로는 모든 장소에서 일어나는 산재에 책임을 지게 된다.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노동자·국민들이 참여하는 사고조사위원회를 구성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원청 책임·처벌 강화

이날 의결된 산재 예방대책은 원청의 책임을 강화하는 것, 음식배달원·퀵서비스 기사 등 특수형태노동자를 보호하는 것, 공공·대규모 공사의 안전관리를 강화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정부는 일단 원청의 책임을 현재 수준보다 한층 높이기로 했다. 원청기업은 수은 제련 등과 같이 유해·위험성이 특히 높은 작업은 직접 수행해야 하며, 하청업체를 선정할 때는 작업의 위험성과 관계없이 안전관리 역량을 의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책임 범위 역시 ‘본연의 업무를 도급할 때’에서 ‘부수적 업무를 도급할 때’까지로 확대할 예정이다. 아울러 그동안 원·하청 직원이 함께 작업했을 때만 책임이 적용되던 것을 하청노동자끼리만 수행하는 작업으로도 넓히기로 했다.

산재 예방에 필요한 비용을 하도급 금액에 별도로 포함하는 산업안전보건관리비 제도의 경우 그동안 건설업에만 적용돼 왔으나 조선업에도 도입된다. 아울러 적정 공사비가 확보돼 작업자의 안전이 보장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건설업의 불법하도금에 대한 제재도 강화할 방침이다. 특히 불법하도급을 묵인한 원청이 안전보건조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 노동자가 숨졌을 때에는 가중처벌을 하도록 할 계획이다. 중대재해를 유발한 원청은 앞으로 공공발주 공사에 입찰할 때 불이익을 받게 된다.

건설공사 발주자의 책임도 강화된다. 발주자는 작업자 안전관리를 위해 작업장 위험정보를 제공할 의무를 지며, 구조물 안전에 대한 책임을 이행하지 않았을 때 일정한 제재를 받는다. 특히 200억원 이상의 공공발주 공사는 발주청·감리자·시공사의 사고 예방활동을 평가하고 공개할 방침이다.

고용노동부는 이런 방안을 내년 하반기부터 시행하는 것을 목표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마련, 내년 3월 국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중대재해가 발생한 원청에 입찰 불이익을 주는 관련법 개정안도 내년 중으로 제출할 계획이다. 발주자 책임강화를 위한 법 개정안 역시 내년 상반기에 제출한다. 프랜차이즈 가맹본부가 가맹점에 요구한 설비와 재료에 대한 위험성 정보를 제공할 의무를 지게하는 법 개정안도 내년 3월 제출할 방침이다.

■퀵서비스·음식배달원도 보호 대상으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에는 또 음식배달원 등 ‘특수형태근로종사자’를 보호대상에 포함하는 내용도 담긴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사업주는 음식배달원·퀵서비스 기사에게 보호장비를 지급하고 안전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이를 어기는 사업주는 5년 이하 징역,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정부는 또 산재보험법 시행령을 올해 하반기에 개정해 영세자영업자들에 고용된 노동자들도 산재보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사망 등 중대재해가 일어나면 작업을 즉시 중지하게 하는 지침도 올 하반기에 만들어진다. 그동안에는 감독관이 판단해 작업중지를 풀어줄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작업계획의 안전성이 보장되는 경우에만 해제토록 할 방침이다.

또 정부는 중대재해의 피해가 크고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경우에는 업계 노동자와 국민이 참여하는 ‘사고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사고를 유발하는 관행과 구조적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도출하는 절차를 밟겠다고 밝혔다. 사고조사위는 올해 하반기부터 시범운영된다.

공공기관과 대규모 사업장의 안전·보건 관리도 강화된다. 정부는 공공기관과 대규모 사업장에 생명·안전업무를 담당할 안전·보건 관리를 직접 채용하도록 추진하기로 했다.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던 ‘물질안전보건자료(화학물질의 유해·위험성, 응급조치 요령, 취급방법 등 16가지 항목에 대한 설명자료)’도 공개할 방침이다. 올해 하반기부터는 공공기관의 안전·보건관리 결과가 경영평가에도 반영된다. 고용노동부는 또 최근 잇따라 사고가 발생한 타워크레인과 철도작업장에 대해서는 검사기준강화, 작업 중 열차시간 조정 후 실시 등의 지침도 만들 방침이다.

■감정노동자들도 법으로 보호

정부는 이와 함께 감정노동 종사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올해 안에 관련 법안을 고칠 계획이다. 법안에는 사용자가 관련분야 노동자의 건강 장해 예방조치를 의무적으로 이행하고 장해가 생기면 업무를 일시 중단시키며, 피해자 치료와 상담 지원등을 하게 하는 내용이 담길 것으로 보인다. 근무자가 정신적, 육체적인 피해를 호소했을 때 사측이 적절히 대응하지 않고 불이익을 줄 경우 처벌한다는 내용도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법이 개정되기 전까지는 우선 ‘고객응대 근로자 건강보호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기업들이 이를 지키는지 정기적으로 점검할 계획이다. 최근 감정노동자들이 업무 도중에 받는 스트레스를 못 이겨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일이 잇따르자 대책 마련에 나선 것이다.

이번에 발표된 정부의 중대 산업재해 예방대책에 대해 노동·안전단체들은 “그동안 요구해온 것들이 상당부분 반영된 진전된 대책”이라면서도 “위험의 외주화를 막으려면 더욱 실효성 있는 조치들이 포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민주노총과 노동건강연대 등으로 구성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연대’는 “생명에 위험을 주는 업무의 도급 금지, 하청노동자 차별금지, 산재 사고시 경영책임자 처벌 등이 함께 이뤄지지 않으면 미봉책으로 그칠 공산이 크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