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히 여겨 달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도 당당한 노동자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노동자로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14일 오전 서울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이주노동자 사망사건 해결 촉구’ 기자회견을 마친 우다야 라이 이주노조 위원장(45)이 말했다. 네팔 출신인 그는 1998년 한국에 들어와 서울 동대문구 봉제공장 등에서 일하다 2009년부터 이주노조 활동을 해 왔다. 그는 “오는 17일로 고용허가제가 시작된 지 13년이 된다. 강제노동과 다름없는 고용허가제를 폐지하라는 요구를 더 이상 무시하지 않았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고용허가제는 송출 비리, 불법체류 등 산업연수생제도의 폐단을 해소하기 위해 2004년 8월부터 시행돼왔다. 그러나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침해하는 독소조항이 최근 이주노동자들의 연이은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도마에 올랐다. 지난 6일 충북 충주 자동차 부품업체의 기숙사에서 숨진 27세 네팔 노동자 케서브 스레스터는 “회사에서 스트레스도 받았고 다른 공장에 가고 싶어도 안 되고, 네팔 가서 치료를 받고 싶어도 안 됐습니다”라는 유서를 남겼다. 이튿날에는 경기 화성의 돼지 축사에서 일하던 25세 네팔 노동자 다벅 싱이 숨진 채 발견됐다. “저는 이제 없습니다. 꿈이 많았으나 이뤄지지 못했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라이 위원장은 “헌법에 보장돼 있고 국제노동기구(ILO) 등에 의해 세계적으로 보장된 직장 이동의 자유가 왜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고용허가제로 입국한 27만 이주노동자들은 예외다. 정부는 인력송출 양해각서(MOU)를 맺은 태국, 몽골, 필리핀 등 16개국의 취업 희망자에게 취업비자(E-9)를 준다. 이주노동자는 맨 먼저 취업한 사업장에서 3년을 일할 수 있다. 계약을 연장할지는 사업주가 결정한다. 사업주가 허락하지 않으면 이주노동자는 회사를 옮길 수 없다.
“‘일이 힘들다’며 회사를 옮겨 달라 해도 사업주들이 ‘그러면 이탈신고 해버리겠다. 불법체류자가 되고 싶느냐’라고 협박하는 경우가 많아요. 돈을 요구하거나 폭행을 하기도 해요. 사업장 변경 허가를 마치 선물인 것처럼 인식하는 사업주들이 많습니다. 당연한 권리인데 어쩌다 허가를 해주면서 ‘고마워하라’고 하는 상황입니다.”
기존 산업연수생제도와 달리 고용허가제는 외국인도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계법을 적용받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직장을 옮길 자유가 없는 이들에게는 법조문 속의 잠든 권리일 뿐이다. 이주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안전사고를 자주 당하는 것도 그래서다. 5월 한달에만 경북 군위 등지에서 축사 정화조를 청소하던 중국, 네팔, 태국 출신 노동자 4명이 숨졌다. 사업주들은 분뇨 유해가스 농도를 측정하지 않았고, 마스크 같은 기본적인 안전장비도 주지 않았다.
20대 네팔 청년들의 자살이 알려진 것은 그나마 이들의 네트워크가 촘촘히 뻗어 있는 덕분이었다. 라이 위원장은 “태국, 우즈베키스탄, 인도네시아 노동자들도 사정은 다 비슷하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깥에 알려야 개선이 되는데, 이주노조에서 파악하고 있는 일들은 빙산의 일각일 것”이라고 말했다. 자국 대사관을 찾아가도 한국과 인력 송출계약을 맺은 당사국들은 문제를 덮으려 하기 일쑤다. 그는 “고용허가제 계약을 맺은 국가들은 대개 노동인권을 보장하는 수준이 낮은 나라들이고, 사망사건이 벌어져도 본국의 가족들에게까지 사정이 잘 전달되지 않은 채 묻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잘 사는 나라에 돈 벌러 와서 무슨 불만이 그리 많으냐’는 한국인들의 시선도 이들 앞에 놓인 장벽이다. 라이 위원장은 “실제로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현장에 가보지 못했다면 현실을 잘 알지 못할 수 있다”고 했다. 고용허가제로 입국한 이주노동자들은 대개 농·어업, 중소·영세 제조업체, 건축업 등 국내 노동자들이 기피하는 열악한 업종에 몰려 있어서 한국인들의 이해도가 낮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그런데도 고용허가제가 성공적인 이주관리 시스템으로 정착했다고 평가한다. 라이 위원장은 “한국 정부가 이주노동자를 관리대상으로만 보기 때문”이라며 “고용허가제의 본질은, 외국 인력은 열악하고 힘든 일에만 종사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노동자들이 기피하는 업종에 이주노동자들을 ‘묶어 놓는’ 구조라는 것이다. “이주노동자들도 웬만하면 회사를 바꾸고 싶어하지 않아요. 노동 조건이 열악하고 사업주들이 나쁘게 대하니까 그런 마음이 드는 거죠.”
그는 “기본권 보장 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들의 ‘노조할 권리’도 실질적으로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단체와 사업주, 정부가 교섭해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주노동자에게도 노동3권은 보장되며, 이주노조는 2015년 합법화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직장 이동 여부를 사업주가 결정하는 한 노동조합은 언감생심이다. 라이 위원장은 “그러기 위해서는 고용허가제가 아닌 ‘노동허가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용허가제가 고용주의 권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노동허가제는 이주노동자에게 일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핵심이다. “사업장을 옮길 수 있게 되면 정부와 사업주도 인력을 끌어오기 위해 처우개선 노력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주노동자뿐 아니라 한국인들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근로조건이 개선되면 자연스레 한국인들도 가서 일할 환경이 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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