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8 김상범 기자
이규혁씨(가명·50)는 4년째 서울의 한 전세버스업체에서 운전대를 잡으면서 단 한번도 연차휴가를 마음대로 써본 적이 없다. 회사는 정부와 공공기관에서 운행 일감을 받아온다. 법정공휴일에 관공서가 쉬면 회사도 쉰다. 하지만 직원들 휴식은 공짜가 아니다. 개인 연차를 깎아가며 쉬어야 한다. 15일부터 시작되는 사흘간의 설 연휴가 이씨에겐 반갑지만은 않다.
달력의 ‘빨간 날’은 평등하지 않다. 법정공휴일은 ‘관공서 문 닫는 날’일뿐, 민간기업 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에 따라 돈 받고 쉴 수 있는 날은 일요일(주휴일)과 5월1일 노동절뿐이다.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직원은 공휴일을 유급으로 누리지만 영세한 중소기업은 연차휴가를 쓰게 하는 일이 많다. 법정공휴일은 삼일절·광복절·개천절·성탄절과 설·추석 연휴 등 연간 총 15일이다. 1년 일하면 주어지는 연차가 최소 15일이니 공휴일에 다 쉬면 이씨 회사같은 곳에선 연차가 연기처럼 사라진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한술 더 떠 비번날까지 연차로 처리하기 때문에 그와 동료들의 연차는 언제나 ‘마이너스’다.
최경재씨(가명·42)는 반월공단의 화학제품 제조업체를 최근 그만뒀다. 직원수가 서른 명이 겨우 넘는 작은 회사였다. 회사의 취업규칙(사규)에는 “공휴일은 연차로 대체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직원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규정에는 직원 과반이나 근로자대표가 동의해야 하지만 반강제로 ‘날치기 서명’를 받는 일이 부지기수다. 최씨는 “연차가 하루도 안 남았다는 걸 나중에야 알고 황당했지만 불만을 얘기하면 왕따당할 것이 뻔했다”라고 말했다. 박씨는 “아이들이 한창 자라는 시기인데 가정을 위해 마음대로 쓸 시간이 하루도 없는 셈이었다”며 퇴직 이유를 설명했다.
민간기업이라도 대기업이나 노동조합이 있는 회사는 사규나 단체협약으로 유급 휴일을 보장한다. 하지만 규모가 작고 노조도 없는 회사는 사정이 다르다. 2011년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 따르면 소기업 44%가 법정공휴일에 급여를 주지 않았다. 휴일 문제가 직장 내 차별이 되기도 한다. 지방자치단체 기간제 직원인 박현재씨(가명·31)는 설연휴 사흘을 무급으로 쉰다. 같은 사무실에서 같은 일을 하는 공무원들은 돈을 받는다. 박씨는 “굉장히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근로기준법이 처음 만들어진 1953년에는 민간기업도 공휴일을 유급으로 쉴 수 있었는데 1961년 군사정권이 관련 조항을 없앴다. ‘휴일 차별’은 바뀔 수 있을까. 최근 여야가 앞다퉈 ‘빨간날 평등법’을 내놨다. 지난 1일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노동자의 정당한 건강권을 위해 차별없는 ‘빨간날’로 휴식의 평등권을 확보해야 한다”라고 하자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김 의원 제안에 화답한다”며 법정공휴일을 모두 유급휴일로 못박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장석춘 한국당 의원도 같은 법안을 내놓았다.
공휴일이 모두 유급으로 바뀌면 사용자들의 수당 부담이 커지기 때문에 장시간 노동 문제를 푸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다만 근로기준법 개정의 핵심 사안인 휴일근로 중복할증 문제에서 여야가 평행선을 달리고 있어, 이번 임시국회에서 ‘빨간 날 평등법’이 통과될지는 불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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