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시사제작국 김현기 PD(43)는 <PD수첩>의 화려한 과거와 초라한 현재를 모두 겪었다. 그는 <PD수첩>으로 입봉한 시사교양 PD다. 2005년 한학수 PD가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을 취재할 때 막내 PD로 합류했다. 당시 MBC에는 제작진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풍토가 있었다. 어떤 사안을 취재하겠다고 보고했을 때 불합리한 이유로 허가가 나지 않은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부장과 국장이 방향을 조언하며 프로그램을 함께 만들어나갔고, 취재와 제작이 잘 이뤄지도록 외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 스폰서 검사, 광우병 위험성 문제 같은 보도들이 그 시기에 나왔다. 〈PD수첩〉이 ‘PD저널리즘’과 탐사보도의 대명사일 때였다.
10년 뒤인 2015년 이 프로그램에 다시 돌아왔을 때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천지가 개벽한 수준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간부들의 사전 허락 없이는 취재도 방송도 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제작이 불허됐다. 진주의료원 폐업을 다루겠다고 했더니 “지방의 병원 하나 문 닫는 일에 누가 관심이 있겠느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을 때에는 “〈100분 토론〉에서 민중총궐기 관련 이슈를 점검할 테니 굳이 〈PD수첩〉에서 다룰 필요 없다”는 답을 들었다. 당시 〈100분 토론〉의 제목은 ‘복면시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였다.
김 PD는 2016년 1월 전 직원의 20%를 희망퇴직으로 감축하려는 두산인프라코어를 취재했다. 희망퇴직 대상자와 대기발령 대상자 10여명을 단독으로 섭외해 ‘다른 언론사를 만나지 말고 기다려달라’고 부탁까지 한 뒤 기획안을 들고 국장실에 들어갔다. 어김없이 제작이 불허됐다. “기업이 경영이 어려우면 정리해고를 할 수 있는데 어떻게 그게 아이템이 되냐”는 이유였다. “노동자들에게 미안하다고 연락했더니 ‘회사가 〈PD수첩〉이 취재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젊은 노동자들을 희망퇴직 대상에서 제외하려고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PD수첩〉이 취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반향이 있었는데, 방송이 나가서 현장의 문제점을 제대로 고발했다면 훨씬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하고 싶던 아이템은 이런 방식으로 불허됐다. 사건사고가 아니면 제작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달라진 것은 너무 많았다. 10년 전 회당 4000만원 언저리였던 제작비는 2000만원대 중반으로 내려앉았다. “PD 2명이 한 팀을 이뤄 열흘 동안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면 무조건 초과할 수밖에 없는 액수”였다. 제작비가 초과되면 PD들의 인사고과를 깎았다.
〈PD수첩〉구성원들은 노조 조합원이 절반, 비조합원이 절반이다. 본부장은 ‘중립성’을 위해 일부러 그렇게 숫자를 맞췄다고 했다. 아이템 제작을 불허당할 때마다 울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문제를 일으키면 그것을 빌미로 〈PD수첩〉을 완전히 엎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PD수첩〉이 정말 이상하고 기형적인 프로그램으로 전락한다면 앞서 거쳐간 동료들을 마주 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굴욕적인 타협을 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고 마음을 다독였다. 그럼에도 얼굴을 들 수 없는 순간이 많았다. 세월호 2주기 때였다. 동료 PD와 “1주기 때도 안 했는데 2주기에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위에서 받아주겠느냐”라는 대화를 나누다 회사 밖으로 나갔다. 유가족이 세월호 문제를 방송해달라는 1인 시위를 하고 있었다.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PD수첩〉 팀은 지난달 21일부터 제작중단에 돌입했다. 10년 전과 완전히 달라진 프로그램에서 숱한 순간을 참았지만, ‘한상균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우리 사회의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살피겠다’는 아이템에 대해 조창호 시사제작국장이 ‘너희 수장 한상균을 구명하려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하는 상황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김 PD는 “비제작부서에 전보됐다 돌아온 이영백 PD 등이 자기검열에 매몰돼 있지 않았던 덕에 저항할 수 있었다”며 공을 돌렸다.
“그때는 일이 이렇게 커질지 예상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우리가 시작한 싸움에는 출구전략이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시사제작국과 콘텐츠제작국 PD들, 기자들, 아나운서들이 각자가 겪은 일을 공개하며 제작중단에 돌입하자 동참자들의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PD수첩〉 팀이 당긴 불씨는 이제 곧 총파업으로 폭발할 시간을 앞두고 있다. ‘우리만 겪은 일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안도감 같은 것을 느꼈다고 했다. “풍선마다 가스가 들어차 있다가 〈PD수첩〉 풍선이 먼저 터진 것뿐이다. 우리 때문에 다른 풍선들까지 터진 것이 아니다.”
김 PD는 제작중단 이후 대기발령 2개월을 받았다. 통상 중징계 전에 내려지는 조치다. PD들을 대표해 기자회견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언론 인터뷰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대기발령을 처음 받았을때 그간의 부채의식이 조금 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2012년부터 이어진 징계와 전보 속에서 아직 차례가 오지 않았을 뿐 언젠가는 자신도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이제야 차례가 온 거라고 생각한다. 다른 동료나 후배가 아니라 자신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프리랜서 작가들이 계속 출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들은 급여도 받지 못한 채 출근하면서 아이템을 찾고,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업무를 여전히 하고 있다. “회사가 급여를 주면서 대기시키든지, 아니면 차라리 작가들에게도 나오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무책임하게 손을 놓고 있다. 너무 미안하고 답답한 마음”이라고 그는 말했다.
촬영만 마치고 편집도 하지 못한 채 제작중단에 나서느라 결방된 아이템도 마음에 걸린다.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고 신장 이상이 생긴 아이를 취재했다. 아이 부모님이 〈PD수첩〉을 믿고 집안과 아이 모습까지 모두 촬영하도록 허락해줬는데 방송은 기약없이 미뤄졌다. 이제 곧 파업이 시작되면 언제 프로그램을 내보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이 상황을 하루속히 해결해 파업이 끝나면 어떻게 해서든 무조건 이 방송부터 내보낼 생각이다. 아이 어머니에게도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드렸으니 반드시 돌아가 약속을 지키겠다”고 김 PD는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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