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파업 때 해직된 박성제 전 MBC 노조위원장을 17일 그가 운영하는 서울 양재동의 스피커 제작업체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제작거부에 나선 MBC 동료들을 향해 “이번엔 타협하지 말고 모든 걸 던져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이번에 제대로 뭔가 해내지 못하면 버림받겠지만, 이번에 제대로 싸워서 시민을 위한 감시견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MBC가 그간 저질렀던 일들을 용서받을 수 있다.”
17일 마주앉은 MBC 해직기자 박성제씨(50)는 “MBC 구성원들이 이번에야말로 주저하지 말고 과감하게 모든 걸 던져서 싸워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나는 잃을 것이 없는 상황이지만 내부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고민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방송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만큼 바닥으로 떨어졌다. 적당히 타협한다면 정말로 버림받을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MBC 노조위원장을 지낸 박 기자는 2012년 6월20일 최승호 PD와 함께 해고됐다. 박성호 기자 등 파업 집행부 4명에 대한 해고도 물론 불법이지만, 당시 노조 집행부도 아니었고 파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도 아닌 박 기자와 최 PD를 해고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무리수라는 지적이 그 때도 나왔다. 지난해 공개된 이른바 ‘백종문 녹취록’에는 백종문 현 MBC 부사장이 “최승호와 박성제는 증거 없이 해고했지만 소송비용이 얼마든, 변호사가 몇 명이 들어가든 내가 알 바 아니다”는 말을 한 사실이 담겨 있다. 박 기자는 다른 해직자 5명과 함께 회사를 상대로 징계무효 소송을 내 2심까지 승소했다.
부당해고 한 달 뒤인 2012년 7월18일 노조는 파업을 접었다. 대선을 불과 몇 개월 앞둔 시기였고, 모든 대선주자와 여야, 방송통신위원회까지 MBC 정상화를 다짐한 상황이었다. 박근혜 당시 후보는 MBC를 정상화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했다. 방송사에는 최대 이벤트인 올림픽이 다가온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최소한의 정상화는 이뤄질 거라고 믿고 업무에 복귀하기로 결정했는데, 오히려 어느 때보다 가혹한 탄압만 돌아왔다. 그는 “우리 힘으로 승리하지 못하고 허황된 약속을 믿은 채 정치권만 바라본 것이 패인이었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정치권에 맡겨둘 생각을 하지 말고 이 싸움을 빨리 끝내야 한다. 제대로 된 사장을 뽑는 일까지 MBC 기자들의 힘으로 쟁취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파업에서 노조가 원하는 바를 얻어낸다 해도 박 기자와 해직언론인들이 당장 복귀하는 것은 아니다. MBC 해직자들은 대법원 판결을 통해서 복직하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그를 비롯한 해고자들은 자신들의 일을 계기 삼아 ‘공정방송을 위한 공영방송 언론인들의 쟁의행위는 정당하다’는 판례를 대법원에서 확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앞으로 다른 언론인들이 MBC와 같은 일을 당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아직도 ‘MBC 좌편향을 견제하려고 종합편성채널을 만들었다’느니, ‘MBC는 정상화됐는데 종편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느니 하는 말을 한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MBC 사태가 다시 반복되지 말란 법이 없다. 판례를 만들어놔야 후배들이 비슷한 일을 당했을 때 해고당할 위험 없이 싸울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해직기자로 산 지난 5년.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이용마 전 노조 홍보국장은 암에 걸렸다. 스트레스가 영향을 줬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해고된 자신보다 박 기자가 더 안쓰러워 하는 건 회사에 남아 온몸으로 고난을 겪고 있는 후배들이다. “술 한 잔 하자며 연락해온 후배들로부터 또 누가 쫓겨났다, 누가 부장과 싸우다 인사고과 최하등급을 받고 밀려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느새 내가 그들을 위로하고 있더라”고 했다. 공영방송 문제를 다룬 최승호 PD의 영화 〈공범자들〉을 보며 울먹이던 후배도 있었다.
그는 해직 후 스피커 제작업체를 만들었다. 그 사이에도 시간을 쪼개 책과 칼럼을 쓰고 소셜미디어를 들여다보며 ‘기자 감각’을 유지하려 애쓴다. 기사를 쓰지 못하는 ‘언론의 경계인’으로서 바라본 미디어의 현실은 해직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세월호 참사를 거치며 시민들은 ‘기레기’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뉴스 수용자들은 콘텐츠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게 됐고, 언론이 권력을 부지런히 감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박 기자는 최근 출간한 책 〈권력과 언론〉에서 “해직기자로 보낸 지난 5년은 우리 언론의 비참한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고민하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고 썼다. 그는 “언론이, 특히 공영방송이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청와대나 야당, 보수세력, 재벌, 광고주 등 그 어떤 권력과도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박 기자는 그렇지 않으면 언론이 결국 시민들의 외면을 받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검찰개혁을 하지 않아도 검찰은 살아남고, 재벌개혁을 안하면 재벌은 더 잘살겠지만 언론개혁을 안하면 언론은 생존할 수가 없다. 독자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기 때문이다. 공영방송은 더 그렇다”라고 그는 말했다.
바닥으로 떨어진 MBC의 신뢰는 회복될 수 있을까. 박 기자는 낙관적이다. MBC가 정상화되고 구성원들이 노력을 한다면 바닥으로 떨어진 신뢰도와 영향력을 생각보다 빨리 복구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는 “돈은 드라마와 예능을 통해 벌지 몰라도, 방송국의 이미지를 만들고 전체 방송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뉴스와 시사프로그램”이라며 “MBC도 뉴스와 시사프로그램만 복구되면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석희 JTBC 사장, 정찬형 tbs 사장, 최승호 PD 같은 언론인을 길러낸 것이 MBC의 조직문화다. 짓눌리고 비제작부서로 쫓겨난 이들이 업무에 복귀한다면 뉴스의 신뢰도와 영향력도 곧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자신도 ‘빨리 복귀하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한다. 박 기자는 부장을 처음 맡아 아침뉴스팀장으로 일하다 파업에 참여했고 곧바로 해직됐다. 그래서 데스크 업무를 경험한 기간이 길지 않다. “기사가 가장 많이 생산되는 부서의 데스크를 맡아, 현장이 그리웠던 후배들과 함께 가장 기초적인 기사부터 업그레이드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그동안 기사에 너무 굶주렸다”며 웃기도 했다.
박 기자는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만 더 버텨서 MBC를 재건할 생각을 하자”고 동료들에게 당부했다. 그는 “지금 싸우는 것은 결국 뉴스를 잘 만들겠다고 하는 일 아니겠나. 파업하면서 어떤 뉴스를 만들어야 하는지 많이 토론했으면 한다. 그동안 회사를 떠나지 않고 안에서 버텨준 후배들이 고맙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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