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입력 : 2018.02.02 21:39:00 수정 : 2018.02.05 10:21:21
“한편으로는 좋고 한편으로는 슬프죠. 힘없는 사람의 폭로와 그래도 힘 있는 사람의 폭로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죠. ‘우리도 이제서야 하네’가 아니라 우리는 언제나 하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모르고 외면했던 것이죠.”
2016년 가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문화예술계 성폭력 폭로 운동이 일었다. ‘#오타쿠_내_성폭력’ 폭로를 시작으로 ‘#문단_내_성폭력’ ‘#영화계_내_성폭력’ ‘#미술계_내_성폭력’ 등의 해시태그를 달고, 침묵의 둑이 터진 것처럼 폭로가 이어졌다. “2016년 말 우리에겐 최순실 지옥과 ‘○○ 내 성폭력’이라는 두 개의 지옥이 함께 있었다.” 당시 ‘책은탁’이란 계정으로 ‘#문단_내_성폭력’ 폭로에 앞장섰던 탁수정씨(34·사진)가 말했다.
최초로 폭로한 2016년 10월부터 15개월 후, ‘#검찰_내_성폭력’ 해시태그가 등장했다. 서지현 검사는 용기 내어 검찰 내 성추행을 폭로했다. “한국에서도 ‘미투(Me Too)’ 운동이 시작됐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우리는 15개월 동안 꾸준히 목소리를 높여 말했어요. 제대로 듣지 않은 건 사회였죠.” 지난달 31일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탁씨가 말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16년 9월 김현 시인이 문예지 ‘21세기 문학’에 ‘질문 있습니다’란 글을 실으면서 SNS를 통해 ‘문단 내 성폭력’ 폭로의 물꼬가 터졌다. 이후 영화계, 미술계, 공연계 등 각계의 성폭력 폭로가 해시태그를 달고 이어졌다.
“저는 출판계 성폭력 피해자예요. ‘17개월 수습’이 끝나고 정직원이 되기 직전 임원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정사원이 된 후 침묵했지만, 1년 후 똑같은 피해를 입은 후배가 나타났을 때, 추가 피해를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심했어요. 뒤늦게 고소했지만 ‘혐의 없음’ 처분이 났습니다. 제가 법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했다고 그냥 침묵하고 있으면 다음 사람도 보호받지 못하잖아요. 2016년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났을 때 어렵게 성폭력 피해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분들을 보며 제가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탁씨의 말을 빌리면 그는 ‘#문단_내_성폭력’ 운동의 ‘허브’ 역할을 했다. ‘책은탁’ 계정으로 SNS에서 쏟아지던 성폭력 폭로들을 정리하고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성폭력 피해자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여성 작가들의 글을 모은 문집 <참고문헌 없음>을 펴내는 데 참여했다.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생생히 담아서 역사에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참고문헌 없음>은 소셜 펀딩 사이트 텀블벅을 통해 6000여만원을 펀딩받았고, 돈은 성폭력 피해자들의 법률·의료 지원금으로 사용됐다.
실명을 단 폭로는 거칠고 위험한 파도처럼 넘실댔다. 파급력은 컸지만, ‘위법’이 될 수도 있다. 현행법에서는 정보통신망에 상대방을 비방할 목적으로 ‘사실’을 적시해도 명예훼손죄가 인정된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사과문을 게시하기도 했지만, 한쪽에선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훼손 등 역고소가 이어졌다. 역고소는 어렵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피해자들을 위축시켰다. 탁씨도 민사소송에서 7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탁씨는 “당시 폭로자의 말만 믿고 정확한 사실 확인 없이 가해지목인의 실명을 공개했다. 내가 잘못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열악한 성폭력법 가진 나라…가해자는 부인하면 끝, 피해자는 모두 입증해야"
이들은 왜 법적 처벌이나 손해배상을 치를지도 모른다는 점을 알면서도 폭로를 감행했을까. 탁씨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아주 열악한 성폭력법을 가진 나라에 살고 있다. 성폭력 가해자들은 법이 자신들에게 우호적이기 때문에 법으로 걸고넘어지고, 피해자들은 법적 처벌이 어려워 폭로를 한다”고 말했다. 탁씨는 “성폭력 피해자가 모든 피해를 입증해야 한다. 가해자는 ‘그런 적 없다’고 부인하기만 하면 된다”고도 했다. “강간당한 직후 몸에서 증거를 채취할 수 있는 종류의 명징한 성폭력은 전체 성폭력 중 그리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말과 말이 싸울 때가 있는데, 수사기관은 피해자의 이야기를 오롯이 들어주지 않아요. 오히려 가해자의 이야기를 듣죠.” 탁씨는 “해시태그 운동 중 일어난 현행법에 대한 반발이 한국의 성폭력법을 좀 더 피해자를 배려하는 방향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2016년 가을, 문단 내 성폭력 폭로에 참여했던 탁수정씨가 지난달 31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hnphoto@kyunghyang.com
법이 항상 가해자들 편에 있진 않았다. ‘#문단_내_성폭력’의 가해자 일부는 법적 처벌을 받았다. 미성년자이던 고양예술고 문예창작과 제자들을 성폭행·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배용제 시인은 지난해 9월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고양예고 문예창작과 졸업생들인 ‘고발자5’가 재학 당시 실기 강사였던 배씨의 성추행·성폭행 사실을 폭로했다. 고양예고 졸업생 107명은 ‘탈선’이란 이름의 모임을 만들어 이들을 지지했다. “문학을 하려면 탈선을 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제자들에게 성폭력을 행사했던 배씨를 고발하며 이들은 “ ‘탈선’은 폭력을 가능케 한 구조와 그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문제제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은 배씨가 항소해 아직 법정 다툼이 진행 중이다. 김모 시인 또한 강제추행 혐의가 인정돼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예술계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한국작가회의는 2016년 12월 소설가 공지영씨를 위원장으로 하는 징계위원회를 구성해 자체 조사에 들어가고 징계 절차를 밟았다. 하지만 결과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작가회의 관계자는 “내부에서 종료된 사건으로 외부에 공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문단’에서 누가 잘못했고, 어떤 조치가 취해졌는지는 ‘비공개’ 정보가 됐다. 탁씨는 “문단 내 성폭력이라고 떠들썩했지만 실제로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이 타격을 받지 않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시상식이나 행사에 가면 여전히 가해지목인은 떳떳하고 피해자는 뒤편에서 떨고 있었다”며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습작생이거나, 무명이거나, 어리니까 힘이 없다”고 말했다. 탁씨는 “이름난 작가, 교수, 문단 내 권력자들이 앞장서서 이야기해주길 바랐지만 거의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정말 어린 친구들이 등단하지 않을 작정하고, 문학하지 않을 작정을 하고 이야기했다”고 덧붙였다.
서 검사의 폭로 이후 ‘미투’ ‘위드유’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번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뤄지고 있다. 서 검사의 폭로 이후 전직 검사나 법조계의 성폭력 폭로도 추가로 이어지고 있다. “검사도 견디지 못해 관두잖아요. 직업을 막론하고 피해자들은 고통스러워요.” 검사 시절 성폭력을 당해 검사를 그만뒀다는 한 변호사의 언론 인터뷰를 보며 탁씨가 말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시스템이 달라지면 좋겠어요. 15개월 전 우리가 미국의 미투보다 먼저, 그리고 더 많이 외쳤어요. 우리가 길을 만드느라 많이 다치고 피를 흘렸는데 걸어가면서 구조까지 바꾸는 건 너무 힘들잖아요. 법부터 바뀌고 시스템들이 바뀌면 좋겠어요. 더 이상 억울한 피해자가 없으면 좋겠어요.”
“성폭력으로 사라져버린 모든 가능성들이 보관되는 행성이 있었으면 좋겠다.” <참고문헌 없음>에 탁씨는 적었다. 많은 여성 습작생, 작가들이 성폭력 이후 문단을 떠나거나 펜을 꺾었다. 하지만 <참고문헌 없음>에 적힌 이들의 외침은 어떤 문학보다 더 강렬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울림을 남긴다.
고양예고 문예창작과 졸업생 연대 ‘탈선’은 말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문단, 학교, 선생은 아니지만 문학은 될 수 있다. 우리는 문학이자 산증인으로 우리를 증명할 것이다.” 이들의 ‘문학’은 계속 쓰여지고 있다.
‘해시태그 운동’은 무엇을 남겼을까. ‘#문단_내_성폭력’ 고발을 한 피해자들에 대한 법률 지원을 맡은 이선경 변호사는 세 단계로 설명했다.
첫째, 피해자들에게 정서적으로 큰 도움을 줬다. 폭로는 치유의 1단계이기 때문이다. 둘째, 가해자가 처벌받았다. 징역 8년을 선고받은 배용제 시인 사건은 이 운동의 가장 큰 성과로 꼽을 만하다. 셋째, 성폭력이 이뤄지는 구조를 바꾸기 위한 논의가 시작됐다.
이 변호사는 “명백한 폭력의 현장을 보고서도 왜곡된 성인식과 사회·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술버릇이나 손버릇이 나쁠 뿐 괜찮은 사람’이라고 평가하면서 사실상 폭력을 방관한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있었다. 그들 때문에 문화예술계 성폭력 사건이 지속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부분 프리랜서로 일하는 문화예술인, 인맥과 연줄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공모전을 통한 등단 시스템 등이 성폭력 문제제기와 해결이 어려운 풍토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이 변호사는 “문화예술계를 포괄하는 분쟁 해결기구, 연줄과 인맥이 아닌 실력을 통해 일할 기회를 보장할 수 있는 공정한 시스템, 왜곡된 성인식을 개선할 수 있는 성폭력 예방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 예술인 성폭력 전담기구 설치 요구
2016년 문화예술계 성폭력 폭로 이후 제도적 개선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문학·영화·미술 등 각 분야의 9개 단체가 함께한 여성문화예술연합은 문화체육관광부에 제도적 개선안을 제안하고 지속적인 대화를 하고 있다. 그 결과 지난해 문체부에서 예술인과 영화인을 상대로 성폭력 실태조사를 벌였고, 영화진흥위원회가 지원하는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이 만들어졌다. 영화 <걷기왕> 촬영 전에 전 스태프가 함께하는 성폭력 예방교육이 이뤄지는 등 현장의 변화가 생기고 있다. 여성예술인연대의 박은선씨는 “지난해 표본 실태조사 결과 우리 내부의 성폭력 지형을 아는 성과가 있었다”며 “큐레이터나 대학 선후배 관계, 교수 성폭력이 많았다. ‘나만 겪은 일이 아니다’라는 걸 공론화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여성문화예술연합은 예술계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성폭력 전담 기구 신설을 요구하고 있다. 이성미 시인은 “예술계는 조직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 작동하는 방식은 조직과 같다. 위계가 있고 높은 권력에 있는 사람에게 저항하기 어렵다”며 “예술계의 특성을 고려한 독립적 성폭력 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성문화예술연합은 성폭력 전과가 있는 예술인에 대한 정부 지원 제한 등도 함께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걸음은 더디다. 지난해 일부 표본을 대상으로 예술계 성폭력 실태조사에 이어 올해 전수조사를 할 계획이었지만 예산이 반영되지 않아 실시 여부가 불투명하게 됐다. 독립된 성폭력 전담 기구 설치도 아직 ‘검토’ 대상이다. 정부와 국회, 제도권 예술의 적극적인 관심과 의지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시인은 “서지현 검사의 싸움을 지지하며, 검찰 내 성폭력적 문화가 바뀌고 성평등 인식이 개선돼 성폭력 피해자들이 수사과정에서 2차 피해를 입는 일이 없어지면 좋겠다”면서 "젊은 여성 예술가들은 가해자와 법정 안팎에서 싸우고 제도적 대안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며 지쳐가고 있다”고 예술계 성폭력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다.
■ 새로운 예술을 모색하는 이들
한편에선 기존 제도권 예술에서 벗어나 새로운 예술을 모색하는 이들도 있다. 고양예술고 성폭력 피해자들과 연대했던 졸업생 모임 ‘탈선’ 중 5명은 ‘우롱센텐스’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을 모색하고 있다. 우롱센텐스의 오빛나리씨는 “우롱센텐스는 말 그대로 ‘잘못된 문법’이라는 뜻이다. 늘 행해진 기성의 문법을 우롱하고, 성폭력을 방조하는 데 쓰였던 문학이라는 이름을 새로 쓰고 싶다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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