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리즈

['침묵'에서 '미투'로](5)여성 예술인들 “정부, 예술인 성폭력 실태조사 더 미뤄선 안돼”

김향미·유정인 기자 sokhm@kyunghyang.com

ㆍ역할 외면해 온 정부
ㆍ전담기구 설치 등 계속 촉구했지만 예산 등 이유로 진행 안돼
ㆍ“각자 계약 가해자, 제재 적어”…문체부 “권익보장 기구 계획”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1일 대구지방검찰청 앞에서 검찰 내 성폭력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1일 대구지방검찰청 앞에서 검찰 내 성폭력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영미 시인이 ‘원로 시인’의 성폭력을 시 ‘괴물’로 폭로하면서 성폭력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문화예술인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여성 문화예술인들은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사태 이후 전면 실태조사와 전담기구 설치 등을 요구해왔다. 정부는 제한적인 표본조사만 실시했다. 예산 등을 이유로 기구 설치 등을 미루고 있다.

이성미 여성문화예술연합 대표는 8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문화체육관광부는 예술인 성폭력 피해신고·상담기구 마련과 전면 실태조사를 더 이상 미루지 말고 당장 실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문화예술연합은 2016년 10월 문단 내 성폭력 증언이 터져나온 이후 여성예술인연대 등 8개 단체가 모여 만든 것이다. 이들은 그동안 피해자 직접 지원과 제도 개선 등을 위해 공동 대응해 왔다.

여성문화예술연합은 지난해 1월 국회 토론회를 시작으로 문체부, 여성가족부에 대책 마련을 요구해왔다. 11가지 정책 제안도 만들어 지난해 3월 문체부 측에 전달했다. 내용은 크게 3가지다. 문체부 내 문화예술계 성폭력 신고·상담 전담기구 설치, 실태조사 실시, 성폭력 예방 교육 강화 등이다.

이 대표는 “제도나 정책을 만들려면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실태조사가 중요하다”면서 “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는 실태조사를 정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예술계 전반을 아우르는 전담기구 설치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이 대표는 “예술계는 큰 덩어리의 공동체로 봐야 한다. 학교나 학원이라는 공간, 특정 프로젝트 현장이나 술자리에서 벌어진 일들이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시 가해자와 피해자가 만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했다.

문체부는 그간 3개 장르의 예술인들을 대상으로 시범 실태조사를 진행했으나, 표본수가 제한적이라는 등의 이유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여성문화예술연합 측은 전담기구 신설이 당장 어려우면 예술인복지재단이 업무를 담당하는 안도 제안했지만, 이 역시 예산을 이유로 실현되지 않았다.

문화예술인 성폭력에 두드러진 현상은 두 가지다. 여성문화예술연합에서 파악한 바로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성폭력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작가 지망생, 습작생, 젊은 예술인에게 SNS 계정으로 메시지를 보낸다. 이들의 작품을 언급하며 신뢰를 얻는다. 작품을 봐줄 테니 만나자고 불러내 성추행한다. 여성문화예술연합은 “심지어 성폭행으로 가는 사례도 있다. 한 명이 여러 명에게 성폭력을 가했다”고 했다.

피해 사실을 증언하는 이들 대부분은 지망생, 습작생이었다. 이 대표는 “문단 내막을 잘 모른다는 점을 노려 가해 지목인들이 터무니없이 권력을 과시했다.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데뷔를 못하게 하겠다’ ‘너를 묻어버릴 수도 있다’ 등의 말로 위협했다”고 전했다.

이 대표는 “창작 강의를 하는 사람의 공모·문학상 심사를 제한한다든지 소수에게 결정권이 집중되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미술 등 다른 부문에서도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성폭력이 많이 일어난다. 가해자는 교수나 사설학원 강사, 미술관 큐레이터 같은 권력을 쥔 사람이 많다. 이 대표는 “예술인들은 각자 계약관계로 일하기 때문에 가해자들이 제재를 덜 받게 된다”고 말했다. 가해자는 문제를 일으킨 뒤에도 다른 기관이나 프로젝트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피해 사실을 폭로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 있다.

이 대표는 “사회적 이름을 아직 얻지 못한 지망생, 습작생, 젊은 예술인들이 데뷔를 포기할 각오로 목소리를 냈는데 지난 1년여간 사회의 반응은 크게 없었다”면서 “피해자들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관심을 더 가져야 할 때”라고 말했다. 여성문화예술연합은 2월 중 국회에서 문학·출판계 내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한 토론회를 연다.

문체부 관계자는 “전담기구보다는 이 문제에 전문성을 갖춘 여가부와 지속적으로 협의하며 대안을 마련하는 쪽으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면서 “앞선 실태조사는 시범적으로 진행한 것으로 장르별로 면밀한 실태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예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