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간부 여검사 성추행 사건.’ 서지현 통영지청 검사가 8년 전 성추행당한 사실을 공개하자, 곧장 이런 이름이 붙었다. 서 검사를 ‘여검사’, 성추행을 저지르거나 이를 은폐한 남성들을 ‘검찰 간부’라고 부르는 것은 남성 검사가 보통명사이고 여성 검사는 여성이라는 특수한 정체성을 설명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른 일터에서도 마찬가지다. 성별 간 임금격차, 직급격차 같은 고전적 차별도 남아있지만, 직장에서 여성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자신을 ‘평등하게 경쟁하는 동료’로 보지 않는 남성들의 시선이다. 여성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고, 여성이 조직 내에서 기회를 얻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가로막는 일이기도 하다. 여성이 승진해 관리자가 되지 못하고, 남성 관리자 사이에서 남성중심적 조직문화가 형성돼 다시 여성이 배제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정춘숙, 박경미 의원(왼쪽에서 두번째부터)이 6일 국회에서 열린 ‘서지현 검사 사건 이후 #미투 운동, 향후 대안 마련을 위한 현장 전문가 간담회’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무엇이 차별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지난해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직장 내 성희롱 실태를 조사한 결과 여성이 가장 많이 들은 성희롱성 발언은 “여자라서 일을 못한다” 같은 ‘성별과 관련된 업무 능력 비하’였다. 업무를 잘못하거나 실수했을 때 남성은 개인의 실수로, 여성은 ‘여자라서 일을 못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런 발언은 차별이다. 최근 소셜미디어에서는 ‘여자’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대체했을 때 어색한 문장은 차별적이므로 쓰지 말아야 한다는 캠페인이 벌어졌다. ‘여자가 예쁨받으려면 여자답게 입어야지’ ‘여자가 과일도 못 깎아?’ ‘여자는 역시 질투가 많아’처럼 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말을 ‘사람’으로 바꾸면 ‘사람이 예쁨받으려면 사람답게 입어야지’처럼 어색해진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콘텐츠가 성차별적인지를 판단하는 데는 1985년 미국 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고안한 ‘벡델 테스트’가 널리 쓰인다. ‘영화에 이름을 가진 여성이 둘 이상 등장하는지’ ‘여성들이 서로 이야기를 하는지’ ‘이야기의 주제가 남자에 대한 것 이외인지’ 등 3가지가 테스트 항목이다.
성평등한 직장 문화의 조건을 따져보는 방법도 있다. 스웨덴에서는 ‘4R’이라는 이름의 조직 성평등 판별 기준을 활용하고 있다. 조직 내 남녀 비율과 관리자 중 남녀 비율이 어떻게 구성돼있는지 등을 살피는 ‘대표성’(Representation), 성별 임금이나 업무시간, 공간 등의 격차를 살피는 ‘자원(Resources)’, 조직 내 규범과 가치가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따지는 ‘현실(Reality)’, 위 세 가지 조건 기저에 깔린 법적 ‘권리(Right)’가 보장됐는지를 본다.
조직의 ‘유리천장’이 얼마나 두꺼운지 살피는 지표도 있다. 지난해 정부 집계에 따르면 한국 매출액 기준 500대 기업 전체 임원 중 여성은 2.7%에 불과하다. 500대 기업 중 67.2%인 336곳에는 여성 임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정부는 2022년까지 고위공무원 중 여성 비율을 10%까지, 공공기관 임원 중 여성 비율을 20%로 늘릴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당장 임원 숫자를 늘리는 것도 의미 있지만 ‘실질적 조건’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미국 대기업 바슈롬이 개발해 임원들에게 회람하는 ‘임원 다양성 체크리스트(Executive Diversity Checklist)’에는 여성들이 실제로 승진트랙을 밟을 수 있도록 하는 조건들이 명시돼 있다. 회사 내 여성들이 상위직 진급 가능성이 있는 업무에 적절히 배치돼 있는지, 발전 가능성이 큰 기회에 여성을 포함시키려 노력하는지, 임원 각각이 적어도 한 명의 여성 관리자에게 멘토 역할을 하고 있는지, 노동자들이 유연한 노동과 육아휴직 제도를 활용하도록 지원하고 있는지 등이 이 조건에 포함된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상임대표는 “남성 관리자들 사이에서 형성된 남성중심적 문화는 조직을 ‘그들이 보는 시각’으로 재생산되게 한다”며 “여성이 조직에 동등하게 적응하고 발전하려면 입직 때부터 차별받지 않아야 하고, 회사 안에서도 고위직으로 갈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청 게시판 ‘들썩’
ㆍ검사 성추행 폭로 후 청원 동의 21만명…답변 대상에
초·중·고등학교에서 페미니즘 교육을 의무화해달라는 국민청원이 20만명 넘는 지지를 받아 청와대의 공식 답변 대상이 됐다.
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 올라온 ‘초·중·고 학교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청원에 5일까지 총 21만3219명이 ‘동의’를 표했다. 이 청원에는 5일 오후 5시까지 동의한 사람이 15만명 정도였으나 7시간 만에 6만여명이 늘었다.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의 검사 성추행 사건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 청원은 지난달 6일 올라왔으며 한 달이 지난 5일 종료됐다. 청와대가 공식 답변을 내놓는 기준인 ‘30일간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기 때문에 공식 답변 대상이 됐다.
청원을 한 사람은 “아직 판단이 무분별한 어린 학생들이 학교에서 여성비하적 요소가 들어있는 단어들을 아무렇지 않게 장난을 치며 사용합니다. 선생님들께 말씀드려도 제지가 잘 되지 않고 아이들 또한 심각성을 잘 모릅니다. 이러한 문제에 경각심을 가지고 개선해 나가야 하지만 쉽게 접할 수 있는 ‘유튜브’ ‘페이스북’에서 이미 자극적인 단어들을 중·고등학생뿐만 아니라 초등학생 사이에서도 쉽게 쓰여집니다”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이 청원자는 “아이들이 양성평등을 제대로 알고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학교에선 주기적으로 페미니즘 교육을 실시하고 학생뿐만 아닌 선생님들까지도 배우는 제도가 있었으면 합니다”라고 썼다.
페미니즘 교육을 의무화하자는 제안에 맞서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반대’ 청원, 페미니즘 교육 청원이 ‘조작’됐다는 주장도 청원 게시판에 줄을 이었으나 동의한 사람은 대개 한 자릿수에 그쳤다.
청와대는 지금까지 20만명 이상이 동의한 전기용품 및 생활용품 안전관리법(전안법) 폐지 청원, 권역외상센터 지원 청원 등에 대해 공식 답변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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